※ 끝까지 읽어보시면,
성경 묵상 글쓰기뿐 아니라 제가 실제로 참고하는 자료들을 카톡으로 받아보실 수 있는 실전성경연구 단톡방 안내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부터 16절 묵상은 ‘하나님을 아는데도, 왜 우리는 서로를 해치는가’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 26/7/30, 858일차,
목차
[살핌]
이사야 11장 1절부터 9절
: 성령으로 충만한 왕과 해침이 없는 나라
이사야 11장 10절부터 16절
: 열방의 기치와 남은 백성의 새 출애굽
[새김]
외모와 소문에 휘둘리는 이유
: 하나님을 아는데도, 왜 우리는 서로를 해치는가
이사야 11장 1절부터 16절 묵상의 배경
이사야 11장은 이사야 10장 끝의 ‘잘려 나가는 숲’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높이 솟은 나무와 울창한 숲은 교만한 앗수르 제국과 권력자들을 가리키며, 하나님 앞에서 모두 베어진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11장에서는 잘린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작은 싹이 돋아난다.
이사야 12장은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노래이다. 따라서 11장은 심판에서 찬양으로 넘어가는 다리이다.
하나님이 의로운 왕을 세우고 평화를 이루며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기 때문에, 공동체는 마침내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이사야 11장 1절~2절
: 왕의 기원과 성령의 임재
1절에서 하나님은 다윗 왕조가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새로운 왕과 새로운 열매를 일으키신다.
이사야 10장 끝의 거대한 숲이 베어지는 장면과 정반대이다. 앗수르의 크고 높은 나무는 쓰러지지만, 이새의 작고 낮은 그루터기에서는 생명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크기를 뒤집고, 인간이 끝이라고 부르는 자리에서 약속을 다시 시작하신다. 작은 시작이 단순히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결실로 나아간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다. 다윗이라는 왕의 영광보다 그 이전의 소박한 시작인 ‘이새’로 돌아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타락한 왕권을 겉으로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부르심의 뿌리에서 새롭게 시작하신다.
‘숨겨진 뿌리’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은 생명의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영적 생명은 겉줄기가 잘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감추어진 근원에 남아 있다가 다시 가지와 열매로 나타난다.
우리가 실패를 했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진실한 중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내 삶에서 잘린 그루터기처럼 보이는 영역을 적어 본다. 그 자리를 억지로 멀쩡한 나무처럼 꾸미지 말고,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도록 정직하게 내어 드린다.
하나님은 과거의 영광을 복제하지 않고, 실패한 자리의 뿌리에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신다.
2절에서 이상적인 왕의 능력은 혈통이나 정치 기술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의 위에 머무시는 여호와의 영에서 나온다.
이사야 11장 1절이 왕의 출신을 말한다면, 2절은 왕의 자격을 말한다. 다윗의 혈통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지혜롭고 공정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으로 만드신다.
본문에서 나오는 지혜와 이해는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게 한다. 모략과 능력은 옳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게 한다. 지식과 경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 권위에 순종하게 한다.
세 쌍은 생각, 실행, 관계의 균형을 이룬다. 지혜만 있고 실행력이 없거나, 능력만 있고 하나님 경외가 없는 불균형한 지도자가 아니다.
성령 충만은 강한 감정이나 특별한 현상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절에서는 정확한 판단, 책임 있는 실행, 하나님 경외라는 성품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이 지성을 밝히고, 지성이 감정과 행동을 바르게 이끈다. 우리는 영적 열심과 분별력, 계획과 실행, 지식과 경외가 함께 자라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지혜를 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하지 않는다. 이해, 계획, 실행할 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함께 구한다.
성령의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을 넘어, 옳게 분별하고 용기 있게 실행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사야 11장 3절~5절
: 왕의 판단 기준과 성품
3절에서 이상적인 왕은 하나님 경외를 의무로 견디는 것이 아니다. 기쁨으로 누리며, 겉모습과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2절의 여호와 경외가 3절에서 왕의 내면적 즐거움이 된다. 이어서 그 경외가 실제 재판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사람의 외모, 지위, 대중의 소문에 끌려가지 않는다.
וַהֲרִיחוֹ, wa-hărîḥô, “바하리호”는 매우 독특한 표현이다. ריח, r-y-ḥ 계열은 냄새를 맡거나 향기를 즐긴다는 뜻을 가진다.
문자적으로는 “여호와 경외 안에서 냄새 맡는다”에 가까우며, 문맥상 “여호와 경외를 기뻐한다” 또는 “여호와 경외로 예민하게 감지한다”로 번역된다.
하나님 경외는 두려움에 눌리는 종교적 불안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이다. 참된 분별은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중심에서 나온다.
“눈에 보이는 대로”와 “귀에 들리는 대로”는 평행을 이룬다. 이는 눈과 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겉모습과 확인되지 않은 말만으로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냄새를 눈과 귀보다 더 미세한 내적 감지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 경외가 자기 과시와 욕망의 소음을 낮추면, 사람은 사건의 표면 아래에 있는 진실을 더 세심하게 살필 수 있다.
내면에서는 ‘내가 이미 옳다’는 확신이 줄어들고, 하나님 앞에서 천천히 듣는 태도를 형성하게 된다.
사람에 관해 들은 첫 이야기와 처음 본 인상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당사자의 말, 사실관계, 약자의 입장을 확인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외모와 소문보다 진실을 찾는다.
4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정의는 가장 힘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 검증된다.
3절은 잘못된 판단 기준을 제거했다. 4절은 올바른 판단의 내용을 보여 준다. 왕은 권력자에게 유리한 재판을 하지 않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공정한 판결을 제공한다.
앞부분은 약한 자를 위한 구원이고, 뒷부분은 악한 자를 향한 심판이다. 같은 공의가 억눌린 자에게는 보호가 되고, 억압자에게는 심판이 된다.
경계와 판단의 힘은 질서를 세우지만, 절제되지 않으면 잔혹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정의와 공정함이 그 힘을 바르게 이끌어 약자를 보호하게 한다.
왕권은 내면의 뜻이 말과 행동을 통해, 현실에 드러나는 자리이다. 따라서 왕의 말은 정의를 현실에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우리의 말도 약자를 살리는 힘이 될 수도 있고, 힘없는 사람을 더 억누르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지도자나 공동체의 영성을 평가할 때 말솜씨보다 약자에 대한 결정과 정책을 봐야 한다. 내 선택이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만 유리하지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5절에서 공의와 성실은 왕이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도구가 아니다. 언제나 몸에 붙어 있는 기본 성품이다.
허리띠는 옷을 정돈하고 몸의 움직임을 준비하게 한다. 따라서 공의와 성실은 그의 모든 행동을 묶어 주고 지탱하는 중심 원리이다.
메시아 왕은 공의를 선전하지만 사생활에서는 불의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외적 통치와 내적 성품이 일치한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력은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일관성이다.
띠는 위와 아래, 생각과 행동, 의도와 실천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 될 수 있다. 신실함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흔들리는 삶을 중심에 붙들어 주는 지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지속적인 신실함을 만들려면, 깨달음을 행동으로 묶어 일관된 인격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고백하는 진리와 실제 생활 사이가 얼마나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사람들이 볼 때만 정직하려 하지 않는다. 약속, 돈, 시간, 말과 행동에서 반복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오늘의 허리띠로 삼는다.
공의는 보여 주는 장식이 아니라, 모든 행동을 붙드는 일상의 성품이다.
이사야 11장 6절~8절
: 포식 관계의 변화
6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포식자와 약자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사자와 송아지는 포식자와 먹잇감의 짝이다.
마지막에는 힘없는 어린아이가 이 모든 동물을 이끈다. 힘의 서열이 완전히 뒤집힌다.
품어주고 확장하는 사랑과 제한하고 제어하는 힘, 둘 중 하나가 통제되지 않으면 무질서한 방임이나 폭력적 억압이 된다. 이 두 힘을 진리와 자비 안에서 조화시켜야 한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모습은 인간 안의 공격성과 연약함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보여 준다.
이를 내면의 갈등과 욕망이 바르게 정돈되고 회복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평화를 위해 약한 사람에게만 “용서하고 참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먼저 힘 있는 사람이 포식적인 말, 특권, 통제 습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성경적 평화는 약자가 강자를 견디는 상태가 아니라, 강자의 해치는 힘이 변화되는 상태이다.
7절에서 하나님의 회복은 폭력적인 행동만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존재를 삼키려는 욕망 자체를 변화시킨다.
6절에서는 포식자와 먹잇감이 함께 머문다. 7절에서는 사자의 먹는 방식이 바뀐다. 평화의 깊이가 공간적 공존에서 욕망의 변화로 발전한다.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다는 표현은 포식 본능의 근본적 변화를 나타낸다.
죄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의 목록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 관심, 재산, 안전, 존엄을 먹어 치우려는 왜곡된 욕망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행동을 억누르는 것뿐 아니라 욕망의 방향을 바꾼다.
이 절에서 곰과 사자의 힘은 제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힘을 유지하는 먹이와 욕망의 방식이 달라진다.
인간 내면에서도 강한 추진력이나 열정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소비하지 않고 생명을 섬기도록 방향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누구를 소모하고 있는가”를 묻게 한다.
겉으로 공격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상대의 실패를 은근히 기뻐하거나, 관심과 인정과 성과를 독점하려는 마음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
참된 회복은 폭력을 참는 수준을 넘어, 남을 먹어야 만족하는 욕망을 바꾼다.
8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안전은 강한 사람이 위험을 통제하는 모습이 아니다. 가장 연약한 아이가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6절에서 어린아이가 동물들을 이끈다. 8절에서는 더 어린 아기가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논다. 평화의 강도가 점점 높아진다.
뱀은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창세기 3장의 위험과 저주를 떠올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 본문 자체의 핵심은 위험의 상징이, 더 이상 어린 생명을 해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두려움이 당연시되는 세계를 바꾼다.
뱀은 통제되지 않은 욕망, 속임수, 생명력을 비뚤게 사용하는 충동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어린아이는 꾸미지 않은 단순함과 신뢰를 나타낸다.
회복이 이루어지면 위험한 충동은 더 이상 순수한 생명을 삼키지 못한다. 손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행동도 두려움에 마비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실제 위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뜻이 아니다.

가정과 교회가 안전한 공동체인지 판단할 때 어린이와 약자가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학대와 위험을 영적인 말로 덮지 않고, 구체적인 보호 장치를 마련한다.
하나님 나라의 안전은 가장 연약한 사람이 두려움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안전이다.
이사야 11장 9절
: 평화의 근본 원인
9절에서 해침과 파괴가 사라지는 근본 이유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계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평화는 하나님 지식의 결과이다. 또한 “내 거룩한 산”에서 시작된 평화가 “땅” 전체로 넓어진다.
성경을 많이 알고 종교 활동을 많이 해도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이 절이 말하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 신실함, 자비와 거룩함에 참여하는 삶이다.

바닷물이 모든 곳을 채우듯,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에까지 스며들면 폭력과 미움이 자리 잡을 틈은 줄어든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다. 그 지식이 실제로 사람을 살리고 관계를 회복시키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말씀을 공부한 뒤 반드시 한 가지를 묻는다. “오늘 배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내가 누군가를 해치는 행동을 어떻게 멈추게 하는가?”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지식은 사람을 더 거칠게 만들지 않고, 해침과 파괴를 멈추게 한다.
이사야 11장 10절
: 열방을 모으는 기치
10절에서 다윗 계열의 왕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지도자를 넘어, 열방이 찾아와 소망을 얻는 중심이 된다.
1절에서는 뿌리에서 나온 가지였지만, 10절에서는 그 왕 자신이 ‘뿌리’로 불린다. 이는 그가 이새의 계보에 속한 자이면서 새 시대를 지탱하는 중심이 됨을 시적으로 나타낸다.
수직으로 선 기치는 위와 아래, 하늘의 뜻과 땅의 삶을 연결하는 축으로 볼 수 있다. 중심이 분명해질 때 흩어진 욕망과 관심도 그 중심을 향해 정돈된다.
참된 영적 중심은 사람을 억지로 지배하지 않고, 안식과 영광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찾아오게 한다.
교회와 신자의 삶이 사람을 압박하는 깃발인지, 지친 사람이 진리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기치인지 살펴본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열방을 억지로 끌어오는 정복자가 아니라, 열방이 소망을 찾아오는 중심이다.
이사야 11장 11절~12절
: 남은 자의 귀환
11절에서 하나님은 아무리 멀리 흩어진 사람도 잊지 않으시며, 다시 손을 펴서 자신의 백성으로 회복하신다.
‘남은 자’는 가치가 적은 찌꺼기가 아니다. 심판을 통과한 뒤 하나님이 약속을 이어 가시는 씨앗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많은 사람이 남았는가보다, 하나님이 남은 사람을 다시 붙드시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손은 흩어진 조각들이 근원으로 돌아오는 회복의 이미지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의 마음도 과거의 상처, 불안, 욕망과 역할 속에 흩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손은 그 흩어진 주의력과 정체성을 다시 한 중심으로 모아 “너는 내 백성이다”라는 소속을 회복시킨다.
우리는 멀리 떠난 사람도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펴실 수 있음을 믿고, 정죄보다 돌아올 통로를 준비한다.
하나님의 손은 멀리 흩어진 남은 자를 끝까지 찾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세운다.
12절 귀환은 흩어진 사람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낸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기치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모으신 결과이다.
10절에서는 이새의 뿌리가 기치가 된다. 1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기치를 세우신다. 메시아 왕의 사역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밀접하게 연결된다.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강제로 쫓겨났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떠났으며, 어떤 사람은 죄와 잘못된 선택으로 멀어졌다. 하나님은 각자의 흩어짐을 아시고 구체적으로 모으신다.
사방은 삶의 전체 영역을 상징할 수 있다. 생각은 하나님을 향하지만 감정은 두려움에 붙잡히고, 말은 믿음을 고백하지만 행동은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기치는 생각, 감정, 말, 행동을 한 중심으로 다시 모은다. 인간 내면의 회복은 어느 한 부분만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삶 전체가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통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길을 잃은 사람에게 알아서 돌아오라고 하지 않는다. 기치를 세우고 직접 모으신다.
이사야 11장 13절
: 형제 공동체의 화해
13절에서 하나님의 회복은 외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뿐 아니라, 같은 백성 안에 오래 쌓인 질투와 적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절의 후반은 대칭 구조이다.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않는다.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히지 않는다.
한쪽의 질투와 다른 쪽의 억압이 모두 다루어진다. 화해는 한쪽만 회개하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외부의 원수가 사라져도 내부의 비교와 경쟁이 남아 있으면 공동체는 다시 갈라진다. 하나님은 흩어진 몸만 모으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을 바꾸신다.

한쪽이 다른 쪽을 없애려 하면 균형이 무너진다. 조화는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힘이 진리와 자비 안에서 함께 일하게 한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화해는 내 안의 경쟁하는 역할과 욕망이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재정렬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관계가 멀어진 이유를 상대방의 잘못 하나로만 설명하지 않아야 한다. 내 안의 질투, 비교, 우월감, 상대를 통제하려는 태도를 함께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시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서로를 질투하고 괴롭히는 마음까지 치유하신다.
이사야 11장 14절~16절
: 대적의 굴복과 새 출애굽
14절에서 이 구절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과거의 적대 세력을 이기는 역사적 승리를 묘사한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나 국가가 침략을 정당화하는 명령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13절에서 에브라임과 유다가 화해한다. 14절에서는 화해한 두 집단이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고 외부 대적을 향해 함께 행동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국토를 위협하고 약탈하던 주변 세력에 대한 정치적 역전이다.

에브라임과 유다가 화해한 뒤, 통합된 내면이 파괴적 충동과 거짓 습관에 맞서는 모습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민족 이름을 오늘날의 특정 민족이나 개인의 악한 본성에 직접 대응시키면 안 된다. 영적 전쟁의 대상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거짓, 억압, 탐욕과 폭력이다.
악과 불의에는 단호하게 저항하되, 상대를 인간 이하로 만들거나 증오를 거룩한 열심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승리는 악을 끝내지만, 사람을 증오하고 침략하라는 허가가 아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백성 앞의 거대한 장애물을 없애기만 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이 신을 신고 걸어갈 수 있는 통로로 바꾸신다.
흩어진 백성은 애굽과 앗수르 방향에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서쪽에는 애굽 바다의 물길이 있고, 동쪽에는 유브라데강이 있다. 하나님은 출애굽 때처럼 물을 가르셔서 귀환을 가능하게 하신다.
구원은 장애물이 전혀 없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장애물을 건널 수 있는 상태로 바꾸시고, 백성이 실제로 발을 내딛게 하신다.
신을 신고 건넌다는 표현은 특별한 영웅만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이 통과한다는 뜻을 강조한다.
문제가 한순간에 사라지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주신 작고 현실적인 통로를 찾아 오늘 한 걸음을 내딛는다.
하나님은 두려운 장애물을 평범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로 바꾸신다.
16절에서 하나님은 과거에 행하신 출애굽을 기억하게 하시면서, 새로운 시대의 백성을 위한 새로운 귀환의 길을 여신다.
새로운 구원은 과거 출애굽과 닮았지만, 여러 민족과 지역으로 흩어진 남은 자를 모은다는 점에서 더 넓다.
본문은 1절의 작은 싹에서 시작하여 16절의 큰길로 끝난다. 길은 멀어진 사람과 끊어진 삶을 다시 연결하는 통로이다.
하나님의 빛을 잠시 경험하는 것보다, 그 빛을 따라 계속 걸을 수 있는 삶의 길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면의 회복도 한 번의 감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도와 말씀, 회개와 관계 회복을 꾸준히 실천할 때 흩어진 생각과 행동이 한 방향으로 모인다.
영적 성장은 매일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과정이다.
참된 구원은 돌아오라고 외치는 명령만 주지 않고, 실제로 돌아올 수 있는 큰길을 만든다.
이사야 11장 1절부터 16절 묵상을 마무리하며…
이사야 11장 1절부터 16절 묵상을 하면서, 평화는 갈등을 피하거나 마음만 편안해지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왕이 약자를 보호하고, 폭력적인 욕망과 질투, 불공정한 판단을 바로잡아 관계와 공동체 전체를 회복하는 정의로운 평화이다.
개인도 무너진 관계와 실패를 숨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 인정해야 한다. 소문이나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며, 타인을 이용하거나 억누르려는 욕망과 질투를 살펴야 한다.
또한 기도와 말씀, 회개와 관계 회복을 꾸준히 실천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따름&드림]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것에만 휘둘리지 않게 하소서.
성급히 판단하기보다, 하나님의 기준과 관점을 먼저 떠올리게 하소서.
우리 내면에 진실의 소리가 더욱 커지게 하소서.
시기, 질투의 경쟁을 멈추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매일매일 꾸준히 하나님의 길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사야 11장 1절부터 16절 묵상 성경 큐티 글쓰기는, 개인적으로 정리한 신앙적 성찰입니다.
< 성경 묵상 더 보기 >
추천 성경 묵상
시편:2편1절~12절, 뽕짝부르스 찬양이 찬양인가?
자유롭다 믿을수록, 더 쉽게 지배당하는 이유?진짜 자유는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