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5장 1절부터 12절 묵상, 기다림의 인내가 없으면, 생기는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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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5장 1절부터 12절 묵상은 ‘기다림의 인내가 없으면, 생기는 피해: 실력자가 갑자기 망하는 진짜 이유‘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 26/8/13, 872일차,

[살핌]

이사야 25장 1절부터 5절

: 포학한 성읍을 무너뜨리고 빈궁한 사람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

이사야 25장 6절부터 12절

: 모든 민족에게 생명의 잔치를 베푸시고 교만한 성벽을 낮추시는 하나님

[새김]

기다림의 인내가 없으면, 생기는 피해
: 실력자가 갑자기 망하는 진짜 이유

이사야 25장 1절부터 12절 묵상의 배경


이사야 25장은 황폐해진 세계 한가운데서 시온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고 선포한다.

이사야 24장은 땅이 황폐해지고 ‘혼돈의 성읍’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지막 24장 23절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신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25장 6, 7, 10절의 “이 산”은 문맥상 시온산을 가리키는 해석이 가장 유력하다.

이사야 26장은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라는 노래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성읍의 성벽은 돌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며, 교만한 높은 성읍은 가난한 사람의 발아래까지 낮아진다.

이어서 26장 19절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말하므로, 25장 8절의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은 단순한 전쟁 종식보다 더 넓은 생명 회복을 향한다.

25장1절
: 오래전에 세우신 뜻을 성실하게 이루신 하나님


1절에서 참된 찬송은 감정의 고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뜻을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셨다는 확인에서 나온다.

24장에서 세계가 흔들리고 성읍이 무너진 뒤, 화자는 먼저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선언이 개인과 공동체의 신뢰 고백으로 바뀐다.

화자가 찬송하는 이유는 놀라운 일이 우연히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계획하신 뜻을 성실하게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좋은 생각을 내어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아니라, 오래 세우신 뜻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루시는 분이다.


문장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높이겠다”와 “찬송하겠다”라는 두 결단,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이유 설명으로 구성된다. 찬송의 감정 앞에 하나님의 행동과 신실함이라는 근거가 놓인다.

1절의 개인적인 “나”는 3절의 강한 민족과 6절의 모든 민족으로 확대된다. 한 사람의 찬송이 세계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미리 보여 준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약속만 정확하게 말하는 성품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뜻이 현실이 되도록 역사 속에서 행동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원하는 결과가 즉시 나타날 것이라는 낙관이 아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기간에도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 드러난 행동을 근거로 관계를 지키는 태도다.


현실에 나타난 결과를 하나님의 근원과 다시 연결하는 자리가 바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다.

구원을 자기 능력과 공로의 증거로 붙잡으면 결과가 다시 교만의 재료가 된다. 하지만 그것을 신실하신 하나님께 돌려드리면 받은 힘이 감사와 책임으로 흐른다.

찬송은 하나님께 부족한 영광을 더하는 행동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구원을 그 근원과 다시 연결함으로써, 사람이 그 결과를 자기 소유로 가로채지 않도록 바로잡는 행동이다.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 결과를 내 능력으로만 설명하면, 나는 그 성공으로 새로운 성벽을 쌓게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를 붙들어 준 도움과 약속의 성취를 인정하면, 그 결과는 나를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더 책임 있게 살게 하는 근거가 된다.

감사는 받은 도움을 잊지 않는 행동이다. 무엇이 나를 살렸는지 정확히 기억할 때, 나는 그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보낼 수 있다.


기도할 때 아직 받지 못한 것만 열거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지켜 주신 일, 오래 걸렸지만 이루어진 일,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하루를 마칠 때 “오늘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한 가지”를 기록하면 막연한 감사가 실제 신뢰로 바뀐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은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오래 세우신 뜻을 끝까지 이루시는 신실함에서 나온다.

25장 2~3절
: 견고한 성읍의 몰락과 강한 민족의 두려움


2~3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호해야 할 성벽이 억압을 지키는 구조로 변했을 때 그 견고함을 해체하신다.

2절은 1절에서 찬송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영원할 것처럼 세운 견고한 성읍과 궁전을 무너뜨리신다.

3절에서는 그 결과가 다른 민족에게까지 전달된다. 강한 민족과 포학한 나라들은 자신들의 힘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을 두렵게 만들던 세력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위치로 바뀐다.


2절은 성읍→돌무더기, 견고한 성읍→황폐, 외인의 궁성→성읍이 아님, 영원한 건설→영원한 폐허라는 연속적인 해체를 보여 준다. 외형, 기능, 명칭, 미래가 차례로 제거된다.

3절의 “그러므로”는 성읍의 몰락과 민족의 반응을 연결한다. 하나님은 단지 한 나라를 파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사건을 통하여 다른 권력들의 자기 인식을 바꾸신다.

하나님은 강함 자체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강함이 약자를 보호하는 책임에서 벗어나 자기 영광과 억압을 보존하는 수단이 되었을 때 심판하신다.


인간이 영원히 유지될 것처럼 만든 체계도 하나님의 정의보다 오래갈 수 없다. 보호해야 할 성벽이 억압을 숨기는 장벽이 되면 하나님은 그 성벽을 해체하신다.

하나님께 받은 힘을 자기 소유처럼 붙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못하게 만드는 껍데기가 된다.

성벽은 원래 사람을 지키는 경계이다. 하지만 포학한 자가 그것을 자기 권력과 영광을 지키는 도구로 사용하면, 보호의 공간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구조로 변한다.

힘이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범위와 한계를 세우는 것은 절제의 작용이다. 힘이 책임과 보호의 경계를 벗어나면, 성읍은 높아지지만 사람은 작아진다. 하나님은 그 성벽을 해체하여 힘이 더 이상 무제한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신다.


조직, 돈, 지위, 규칙은 원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그것을 내 자리와 우리 집단의 이익만 지키는 데 사용하면, 겉은 견고해져도 내부에서는 사람이 밀려나고 관계가 무너진다.

회복은 더 높은 벽을 만드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힘을 어디까지 사용할 것인지 한계를 정하고, 그 힘으로 피해를 본 사람에게 책임을 지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지키려는 성벽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체면, 직위, 돈, 정보 독점, 가족 안의 침묵 규칙이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잘못을 숨기기 위해 더 많은 설명과 권한을 사용하는 대신, 사실을 공개하고 피해를 바로잡는 것이 성벽을 낮추는 첫 행동이다.

사람을 보호해야 할 힘이 사람을 억압하는 장벽이 되면 하나님은 그 견고함을 돌무더기로 만드신다.

25장 4~5절
: 빈궁한 사람의 요새와 포학한 사람의 낮아진 노래


4~5절에서 하나님의 승리는 원수가 무너졌다는 사실보다, 가난한 사람이 안전해졌다는 결과로 확인된다.

2절의 인간 성읍은 무너졌지만, 4절에서 하나님 자신이 빈궁한 사람의 요새가 되신다. 본문은 “성벽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돌로 만든 성벽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호가 참된 요새라고 말한다.

포학한 사람의 기세는 폭풍과 뜨거운 열기처럼 생존을 위협한다. 하나님은 더 큰 소란으로 그들과 경쟁하지 않고, 폭풍을 막는 피난처와 햇빛을 가리는 구름이 되어 그 힘을 제한하신다.

하나님은 약한 사람에게 견디라고만 명령하지 않고, 폭력이 그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실제 보호 공간을 만드신다.


4절에는 “요새”가 두 번 반복되고, 이어 “피난처”와 “그늘”이 병행된다. 단단한 건축물의 이미지와 부드러운 구름의 이미지가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보호가 견고하면서도 생명을 살리는 방식임을 보여 준다.

5절은 포학한 사람의 “소란”과 “노래”가 낮아진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신음 위에 세워진 승리의 노래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정의는 추상적인 공평이 아니다.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을 먼저 보호하는 행동이다.

가난한 사람이 폭력을 피할 장소를 얻지 못한다면, 심판은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약한 사람에게 “이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든다.


본문에서는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받아야 사는 자리가 나온다. 이것은 가난하고 낮은 자리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낮음은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공급을 받아 실제 삶으로 드러내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내려온 보호가 가장 약한 사람에게 도달하는지를 통해 전체 관계가 바른지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을 주는 힘은 책임과 한계를 세우는 힘과 연결되어야 한다. 주기만 하고 폭력을 막지 않으면 약한 사람은 계속 다친다. 또한 막기만 하고 공급하지 않으면 안전한 감옥이 된다. 하나님은 폭풍을 제한하면서 동시에 그늘을 제공하신다.


공동체가 건강한지는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지가 아니다. 가장 약한 사람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사람을 반복해서 해치는 행동과 구조에, 분명한 한계를 세워야 한다.

보호만 하고 삶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않아도 문제다. 위험을 막는 일과 다시 살아갈 조건을 제공하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기도하겠다”고 말하고,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폭력, 괴롭힘, 경제적 착취, 반복되는 모욕이 있다면 먼저 안전한 장소와 분명한 경계를 마련해야 한다.

가정과 교회, 조직의 규칙도 가장 약한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신고한 사람보다 문제를 드러낸 사실을 더 불편해하는 공동체는 포학한 자의 소란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자에게 더 강해지라고 요구하기 전에 폭풍을 막는 요새와 뜨거움을 가리는 그늘이 되어 주신다.

25장 6절
: 모든 민족을 위하여 베푸시는 시온의 잔치


6절에서 하나님은 억압의 성읍을 무너뜨리신 자리에 모든 민족이 함께 먹는 풍성한 식탁을 세우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위험을 제거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단순한 생존 식량이 아니라, 가장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베푸신다.

이 잔치의 대상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다. 그러나 잔치가 시온에서 열리므로 보편적 구원과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간신히 죽지 않을 만큼 먹이시는 것이 아니다. 존엄과 기쁨이 회복될 만큼 풍성하게 대접하신다.


“잔치”가 두 번 반복되고, 기름진 음식과 숙성된 포도주가 다시 자세히 설명된다. 반복은 양이 많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음식의 완전함과 정성을 강조한다.

2절의 궁전은 외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공간이었지만, 6절의 산은 모든 민족이 초대받는 공간이다. 폐쇄된 궁전이 무너진 자리에 열린 식탁이 세워진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험에서 꺼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관계 안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문 밖의 생존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식탁에 앉은 손님이 된다.

“모든 민족”은 하나님의 목적이 한 민족의 우월성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에 8절은 “자기 백성의 수치”를 제거한다고 말하므로, 보편적 구원이 이스라엘의 고난과 언약을 지우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가 삶의 현실에 머무는 자리는,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의 근원 앞에서 다시 관계를 맺는 식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에게서 내려온 풍요가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의 우월성을 키우는 데 멈추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흘러갈 때, 공급은 생명을 살리는 통로가 된다.

풍성하게 주는 힘은 각 사람의 존엄과 전체의 조화를 살리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풍요를 독점하면 식탁은 다시 궁전이 되고, 손님을 서열화하면 잔치는 새로운 수치의 장소가 된다.


자원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풍성해지는 것은 아니다. 음식, 돈, 정보, 기회가 소수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면 풍요는 사람을 나누는 장벽이 된다.

참된 풍요는 가장 좋은 것을 함께 나누되 누구도 동정의 대상이나 하급 손님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을 때 식탁은 관계를 회복한다.

내가 받은 좋은 것을 남은 것으로만 나누지 말아야 한다. 시간, 음식, 지식, 관계의 기회를 나눌 때 상대방도 귀한 손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나누어야 한다.

교회의 식탁과 모임도 친한 사람들끼리 결속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다. 새로 온 사람과 소외된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얻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풍요는 소수가 독점하는 궁전을 만들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이 존중받는 식탁을 만든다.

25장 7~8절
: 가리개와 죽음과 눈물을 제거하시는 하나님


7~8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덮고 있던 죽음의 그늘을 제거하시고, 각 사람의 눈물과 공동체의 수치를 함께 없애신다.

6절의 잔치는 음식만 풍성한 행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손님들의 얼굴을 덮고 있던 가리개, 죽음, 눈물, 수치를 제거하신다.

7절의 가리개가 무엇인지 8절이 설명한다. 그것은 모든 민족을 지배하는 죽음과 그 죽음이 남긴 슬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열방 가운데 겪었던 수치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람을 삼켜 온 죽음을 삼켜 없애신다. 또한 고통을 일반적인 통계로 다루지 않으시고 눈물을 흘린 각각의 얼굴을 직접 돌보신다.


7~8절에는 “모든 민족”, “모든 열방”, “모든 얼굴”, “온 땅”이 연속해서 나온다. 구원의 범위가 특정 지역에서 모든 사람과 온 땅으로 확대된다.

가리개→죽음→눈물→수치의 순서도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지배가 제거되자, 개인의 슬픔과 공동체의 공개적 수치가 함께 사라진다.

하나님은 죽음을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영원한 최종 질서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본문은 죽음이 오랫동안 사람을 삼켰지만 마지막 권한을 갖지는 못한다고 선포한다.

“모든 얼굴의 눈물”과 “자기 백성의 수치”는 개인적 회복과 역사적 회복을 함께 보여 준다. 하나님은 마음만 위로하지 않고 백성을 울게 만든 억압과 공개적 모욕까지 제거하신다.

연기와 돌무더기 속에 무너진 고대 성벽과 높은 요새


25장 8절은 세상에서 “부정한 영”과 뱀의 오염이 제거되는 미래로도 볼 수 있다. 생명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서 두려움, 거짓, 폭력에서 빼앗은 힘으로 유지되는 것들이 있다.

이것이 죽음의 질서를 지속시킨다. 사람이 거짓을 묵인하고 폭력을 반복하며 수치 때문에 침묵하면, 그 구조는 사람에게서 받은 힘으로 계속 작동한다.

선한 가능성을 악의 구조에서 분리하여,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회개, 진실한 말,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악을 우주의 필연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악에게 공급되던 동의와 이익을 끊어야 한다. 그러면 죽음을 먹고 살던 구조가 힘을 잃는다.


죽음을 만드는 구조는 스스로 힘을 만들지 못한다. 사람들이 거짓을 묵인하고, 폭력을 반복하고, 수치 때문에 피해 사실을 숨길 때 그 힘을 빌려 살아간다.

사실을 말하고 잘못을 돌이키며 피해자의 눈물을 닦는 행동이 이어지면, 그 구조는 더 이상 사람들의 침묵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

회복은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다. 고통을 계속 만들던 관계와 행동을 중단시키는 일이다.


눈물을 닦는다는 말은 빨리 울음을 멈추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방의 슬픔을 견디며 곁에 있고, 그 눈물을 만든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행동이다.

피해자에게 수치를 떠넘기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회복을 위해서는 잘못한 사람의 체면보다 피해자의 안전과 명예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은 눈물을 잠시 달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을 울게 만든 죽음과 수치의 지배를 뿌리부터 제거하신다.

25장 9절
: 기다림이 구원의 고백과 기쁨으로 바뀌는 날


9절에서 믿음의 기다림은 손을 놓는 시간이 아니다. 약속이 보이지 않아도 관계와 책임을 지키는 시간이다.

8절까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선포되었다면, 9절은 그 일을 경험한 공동체의 응답을 보여 준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마침내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알아본다.

구원받은 공동체는 자신들이 오래 견뎠다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셨고 실제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기다림은 혼자 버틴 사람의 자랑으로 끝나지 않고 함께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예배로 완성된다.


“이는”이라는 말과 “우리가 그를 기다렸다”는 고백이 각각 두 번 반복된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보는 순간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다. 한 사람이 먼저 말하지만, 그 고백은 곧 공동체 전체의 목소리가 된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언제 일하실지를, 우리가 조절하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응답이 늦어져도 그분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다. 눈물과 죽음과 수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마지막 결론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기다림은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결과가 늦어져도 거짓을 선택하지 않고, 맡은 책임을 다하며,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 약속은 먼 미래의 말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이끄는 방향이 된다.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로 나타나면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구원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기다림이 자기연민과 무기력으로 굳어지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도 막힌다. 그러나 기다림이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면, 오늘의 신실함은 장차 나타날 구원의 기쁨과 연결된다.

일이 풀려도 자신의 인내만 자랑하지 않는다. 나를 붙들어 준 하나님과 함께해 준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러면 기쁨을 혼자 차지하지 않고 공동체와 함께 나눌 수 있다.


결과를 기다리는 문제 하나를 정하고, 그 기간에 지켜야 할 행동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취업을 기다린다면 정직한 준비를, 관계 회복을 기다린다면 사실을 숨기지 않는 대화를, 응답을 기다린다면 맡은 책임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기다림을 핑계로 현재의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미래만 바라보지 않고 오늘 해야 할 선한 일을 지속한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결과가 늦어도 약속에 맞는 행동을 오늘 계속하는 것이다.


25장 10~12절
: 능숙한 손과 높은 성벽으로도 벗어나지 못하는 교만의 심판


10~12절에서 자기 힘과 기술을 절대화한 교만은, 위기가 올수록 더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을 바꾸지 못하면 결국 먼지까지 낮아진다.

“모든 민족”을 위한 잔치 뒤에 모압의 심판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보편적 초대가 폭력과 교만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잔치는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는 교만은 제거된다.

모압은 물에 빠진 사람이 헤엄치듯 손을 펼친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기술만 더 사용하는 행동은 구원이 되지 못한다.

모압은 자기 능력을 최대한 사용하지만 그 능력의 목적과 방향이 교만을 지키는 데 머물러 있으므로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

이것은 스스로 높인 구조가 완전히 해체되어, 처음의 흙과 먼지 수준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10절에서는 여호와의 한 손이 시온산에 안정되게 머문다. 11절에서는 모압의 두 손이 물속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하나님의 손은 흔들리지 않지만, 모압의 손은 능숙해도 방향을 잃었다.

또한 시온의 높은 산과 모압의 높은 성벽이 대조된다. 시온의 높음은 모든 민족을 먹이는 임재의 자리지만, 모압의 높음은 자기 교만을 지키는 요새이므로 먼지까지 낮아진다.

하나님은 민족의 혈통 때문에 모압을 낮추시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그의 교만”이다.

교만은 단순히 자신감이 많은 성격이 아니다. 받은 힘을 자기 힘으로만 설명하고, 다른 사람을 보호해야 할 능력을 자기 지위와 안전만 지키는 데 사용하는 관계 방식이다.


받은 능력을 오직 자신의 실력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지키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교만이다. 이런 사람은 위기가 닥치면 더 빠르고 능숙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목적이 자기 보호에 머물러 있으므로, 바쁜 노력에도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험과 능력이 많아도 그것을 자신만 살리는 기술로 사용하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설명을 늘리고, 사람을 통제하며, 책임을 피할수록 문제는 더 깊어진다.

해결은 더 능숙하게 버티는 데 있지 않다. 먼저 힘을 잘못된 목적에 사용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다음 권한과 돈, 정보와 기술을 자신의 체면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피해를 회복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회복은 능력과 권한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받은 힘을 본래 목적에 맞게 바로 사용하는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더 많은 말과 기술로 빠져나가려 하는지 살펴야 한다. 실수 자체보다 실수를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설명이 더 큰 교만의 성벽이 될 수 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보상과 책임 조정을 실제로 실행해야 한다.

교만한 힘을 낮춘다는 것은 사실을 숨김없이 밝히고, 책임 있게 사과하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또한 힘없는 사람에게 다시 말할 권리와 결정에 참여할 기회를 돌려주는 것이다.

아무리 능숙해도 방향이 잘못되면 사람을 살릴 수 없다. 힘은 자신을 지키는 데 쓰일 때가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고 피해를 바로잡는 책임으로 바뀔 때 회복된다.

이사야 25장 1절부터 12절 묵상을 마무리하며…


이사야 25장 1절부터 12절 묵상을 하면서, 구원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약자를 보호하고 풍요가 함께 흐르며 죽음과 수치가 더는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억압을 지키는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고, 그다음 자신이 가난한 사람의 요새가 되신다. 이어 모든 민족에게 식탁을 열고, 마침내 죽음과 눈물까지 제거하신다.

우리는 불안할수록 더 높은 성벽을 만들고, 문제를 인정하기보다 내 손의 능숙함으로 빠져나가려 할 수 있다. 해결은 더 강하게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힘이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 인정하고, 잘못을 공개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받은 것을 함께 나누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 회복의 행동을 오늘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따름&드림]

오늘의 기도


오늘도 귀한 말씀을 전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저만의 교만한 성벽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물려받은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 남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이런 것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또한 오랜 기다림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기다림이 슬픔과 고통보다, 하나님을 향한 보람과 설렘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들보다,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큰 기쁨과 행복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사야 25장 1절부터 12절 묵상 성경 큐티 글쓰기는, 개인적으로 정리한 신앙적 성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