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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4장 14절부터 23절 묵상은 ‘영광이 부끄러움으로 변하는 이유: 당신도 모르게 문제를 키우는 진짜 원인‘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 26/8/12, 871일차,
목차
[살핌]
이사야 24장 14절부터 16절 묵상
: 땅 끝의 찬송과 배신을 보는 선지자의 탄식이다.
이사야 24장 17절부터 23절 묵상
: 도피할 길이 사라지고 모든 권력이 심판받으며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

[새김]
영광이 부끄러움으로 변하는 이유
: 당신도 모르게 문제를 키우는 진짜 원인
이사야 24장 14절부터 23절 묵상의 배경
이사야 24장 1절~13절은 심판의 원인과 결과를 보여 준다. 사람들이 율법을 어기고 경계를 바꾸며 언약을 깨뜨리자 땅과 도시의 기쁨이 무너진다. 그러나 수확 뒤에 남은 열매처럼 소수의 사람이 남는다.
14절의 “그들”은 이 남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여호와의 위엄을 찬송하지만, 선지자는 계속되는 배신을 보며 탄식한다. 찬송은 시작되었으나 회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17절~23절의 심판은 땅과 권세자들에게까지 미친다. 그러나 결론은 세상의 소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왕이 되시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말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던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24장 14절~15절
: 폐허 속 남은 사람들이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여호와를 높인다.
14절~15절에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소리는 권력과 풍요의 중심이 아니라, 심판 뒤에 남겨진 사람들과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14절의 “무리”는 직역하면 “그들”이다. 문맥상 13절의 감람나무와 포도 수확 뒤에 남은 소수와 연결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들을 남기신 여호와의 위엄을 노래한다.
15절은 그 찬송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서쪽의 바다에서 찬송이 들렸다면 동쪽에서도 여호와를 높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구체적인 언약의 이름은 유지되지만, 그 이름을 높이는 범위는 세계 전체로 확대된다.
본문에서 “소리를 높이다→노래하다→크게 외치다→영화롭게 하다”라는 동사들이 점점 강해진다. 심판으로 사라졌던 7절~11절의 음악이 이제 다른 이유로 돌아온다.
이전의 음악은 술과 소비와 도시의 번영을 즐기던 음악이었지만, 새 노래는 여호와의 위엄을 높인다.
“바다”는 이스라엘에서 볼 때 서쪽을 가리킬 수 있고, “빛”은 해 뜨는 동쪽을 가리킨다. 동서 양끝과 바다의 섬들을 함께 부름으로써 전 세계를 나타낸다. 이사야는 “동쪽과 서쪽 모두”라고 평범하게 말하지 않고, 바다와 새벽빛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한다.
“바다의 섬들”은 오늘날의 작은 섬만 뜻하지 않는다. 지중해의 섬들과 해안 지역, 곧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 민족들을 넓게 가리킨다. 하나님을 높이라는 부름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간다.
남은 사람의 첫 임무는 자신의 생존을 과시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이다. 심판을 통과한 사람은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살아남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위엄을 노래한다.
또한 세계가 하나님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막연한 절대자나 인간이 만들어 낸 공통 종교의 신으로 불리지 않는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보편적 왕권은 그분이 실제 역사 속에서 맺으신 언약과 행동을 지우지 않는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목소리가 하나의 찬양으로 모이는 장면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세상이 다시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인간과 세상은 스스로 영광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생명과 뜻을 삶 속에 드러내는 통로이다.
세계의 각 부분이 자신을 독립된 중심으로 여기고, 자기 이름을 높일 때 문제가 일어난다. 회복은 중심과 주변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자리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데 참여할 때 시작된다.
이때 찬송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과 권력을 근원에게 되돌리는 행위가 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영향력을 자기 힘으로 만든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면 서로 다른 사람과 집단이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경쟁하며 관계가 갈라진다.
회복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다. 각자 다른 자리에서 받은 능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을 과시하는 데 쓰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드러내는 데 사용하는 데 있다.
공동체의 중심에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일을 말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상처를 견디고 남은 사람, 주목받지 못한 사람, 변두리에 있던 사람의 찬송을 먼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내가 받은 기회와 능력을 자랑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 내가 얻은 결과 가운데 내 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감사한다.
폐허 속에서 남겨진 사람은 자신의 생존이 아니라 자신을 남기신 하나님의 위엄을 노래한다.
24장 16절
: 땅 끝의 찬송과 계속되는 배신이 한 절 안에서 충돌한다.
16절에서 참된 믿음은 미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도 지금 계속되는 배신과 고통을 정직하게 말한다.
절의 전반부에는 “우리”가 등장한다. 땅 끝에서 의로우신 이를 높이는 노래를 공동체가 듣는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나는”이 등장하고 선지자 개인의 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나는”은 찬송을 부정하지 않는다. 찬송이 약속된 결말이라면 탄식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실이다. 선지자는 미래의 구원을 핑계로 현재의 배신을 덮지 않는다.
절 앞부분은 “노래, 영광, 의로움”으로 밝게 시작한다. 뒤에는 “쇠잔, 화, 배신”이 연속해서 나온다. 한 절 안에 미래의 찬송과 현재의 탄식이 충돌한다. 연구자들은 이 반복이 14절~16절 단락의 끝을 강하게 닫으며, 배신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을 축소하지 않는다. “결국 잘될 것이다”라는 말로 배신당한 사람의 상처를 서둘러 닫지 않는다. 선지자는 노래를 들으면서도 “내게 화가 있다”고 말한다.
탄식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움을 진지하게 믿기 때문에 배신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거짓과 배신을 정확히 드러내야 한다.
땅 끝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하나님의 생명과 뜻이 온전히 드러날 세상의 미래를 보여 준다. 그러나 현재의 사람과 공동체는 배신으로 갈라져, 하나님의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드러내지 못한다.
배신은 개인 사이의 감정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언약으로 이어져야 할 관계를 끊고, 하나님께 받은 선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길을 막는다.
깨어진 삶과 관계를 바로잡는 회복은 진실을 말하고, 언약과 약속을 지키며, 잘못된 길에서 실제로 돌이키는 데서 시작된다.
앞으로 모든 일이 잘될 것을 알아도 지금의 아픔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거짓과 배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회복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책임을 다할 때 시작된다.
좋은 소식을 전할 때 해결되지 않은 피해를 함께 점검한다. 성공한 행사, 성장한 조직, 회복된 관계를 말하기 전에 그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희생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다.
나의 탄식을 믿음 부족으로 무조건 억누르지 않는다. 다만 탄식이 비난과 냉소에 머물지 않도록, 정확한 사실과 책임 있는 행동으로 연결한다. 선지자는 미래의 찬송을 들으면서도 현재의 배신을 숨기지 않는다.
17절~18절
: 책임을 피해 달아날수록 더 깊은 함정에 빠진다.
17~18절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망할수록 더 깊은 위험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땅의 주민아”라는 부름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음을 뜻한다.
두려운 소리를 피한 사람은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나온 사람은 올무에 걸린다. 위에서는 하늘의 문이 열리고 아래에서는 땅의 기초가 흔들리므로, 사람이 스스로 만든 피난처로 하나님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10절에서 사람들은 집의 문을 닫아 자신을 지키려 했지만, 18절에서는 하늘의 문이 열린다. 인간이 문을 닫는다고 하나님의 심판까지 막을 수는 없다.
두려움, 구덩이, 올무는 짐승을 몰아 덫에 빠뜨리는 사냥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책임을 피하려는 사람도 회피와 거짓말을 반복할수록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줄어든다.
이 심판은 이유 없는 운명의 덫이 아니다. 본문은 율법과 경계와 언약을 깨뜨린 일을 원인으로 밝힌다.
위로부터 생명과 복이 흘러와도, 그것을 바르게 조절할 경계와 절제가 없는 경우가 있다. 더불어 사람과 공동체가 거짓과 폭력으로 뒤틀려 있다면, 그 힘은 오히려 심판으로 나타난다.

회복은 더 영리하게 도망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실을 축소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고, 문제가 드러날 때까지 미루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넘은 경계를 다시 세우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실제로 회복될 수 있도록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24장 19절~20절
: 땅은 사람들의 반역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19~20절에서 사람이 반복해서 쌓은 반역은 개인의 마음에만 남지 않는다. 공동체와 삶의 기반 전체를 흔든다.
19절은 땅이 깨지고, 갈라지고, 흔들린다고 세 번 말한다. 같은 현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가 점점 깊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표면이 깨지는 데서 시작해 구조가 갈라지고, 마지막에는 전체가 안정성을 잃는다.
20절은 그 원인을 밝힌다. 땅을 짓누르는 것은 단순한 자연의 힘이 아니라 “그 위의 죄악”이다. 사람들이 만든 반역과 폭력이 쌓여 자신들이 살아가던 터전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무겁게 여기지 않으면, 자신의 죄가 무거워져 삶을 짓누른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참된 무게를 가진 것으로 남는다.
죄는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거짓말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탐욕은 경제적 약자를 짓누르며, 권력 남용은 법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깨뜨린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사회 전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게 된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만든 악한 질서가 자기 힘으로 회복될 수 없다는 뜻이다. 뒤의 25장~27장에서 회복은 인간 체제의 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으로 온다.
무너진 세계는 더 강한 인간 권력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왕이신 하나님께 다시 정렬되어야 한다.
땅은 하나님의 생명과 뜻이 현실에 드러나는 자리이자,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 머무시는 임재의 상징으로 본다.
따라서 땅이 죄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장면은 물질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힘을 그 근원과 목적에서 떼어 자기 것처럼 사용할 때,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질서가 무너진다는 의미이다.
현실 세계가 위로부터 오는 선한 흐름과 끊어지면 심판과 제한이 나타난다고 본다. 받은 힘을 다룰 질서가 무너지면, 풍성한 능력도 오히려 파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통찰을 준다.
깨어진 삶과 질서를 회복하는 일은 더 큰 힘으로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다. 자비롭게 베푸는 힘과 욕망을 절제하는 경계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돈과 지식을 정의로운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
사람이나 조직이 돈과 권한과 정보를 받으면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처음에는 강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받은 것을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사용하면 신뢰와 규칙과 관계가 차례로 무너진다.
회복은 더 많은 자원으로 문제를 덮는 일이 아니다. 베풀어야 할 때 베풀고, 멈춰야 할 때 멈추며, 권한을 사용한 결과에 책임지는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
내가 실제로 무겁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시간과 돈의 사용으로 확인한다. 입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을 중요하게 말하면서 실제 일정과 지출은 명성, 편의, 이익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지 살핀다.
작은 거짓과 약속 위반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반복되는 작은 배신이 관계와 공동체의 기초를 흔들기 전에 사실을 말하고 약속을 다시 세운다.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여기면 사람이 쌓은 죄의 무게가 결국 삶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24장 21절~22절
: 하늘의 권세와 땅의 왕들이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21~22절에서는 눈에 보이는 통치자뿐 아니라, 그들을 정당화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과 이념까지 하나님의 판결을 피하지 못한다.
심판의 범위가 땅의 주민과 땅의 기초에서 하늘과 정치권력으로 확대된다. “높은 군대”와 “땅의 왕들”이 나란히 등장한다. 높은 곳에 있거나 많은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판결에서 제외되는 존재는 없다.
그들은 죄수처럼 한곳에 모여 갇힌다. 당장 형벌이 집행되지 않고 “여러 날 후”에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연은 면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책임을 잊지 않으신다.
21절은 “높은 곳의 높은 군대”와 “땅 위의 땅의 왕들”을 정확하게 병행한다. 하늘과 땅을 나누면서도 두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사람은 자신의 악을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 조직, 이념, 시장, 전통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움직이는 체계와 그 체계를 이용해 행동한 사람을 함께 심판하신다.
왕은 “구조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변명할 수 없고, 공동체는 “왕 한 사람의 문제였다”고 책임을 끝낼 수 없다. 하나님은 권력을 만든 사고방식과 실제로 명령하고 실행한 통치자를 모두 다루신다.
“높은 군대”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작용하는 영적 권세로 볼 수 있다. “땅의 왕들”은 이러한 힘을 역사 속에서 제도와 권력으로 나타내는 통치자들이다. 그러나 영적 힘의 영향을 인정하더라도 인간 통치자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힘을 자기 소유와 영광을 위해 사용하면, 그 힘의 근원과 목적이 왜곡된다. 하나님이 그들을 옥에 가두신다.
깨어진 삶과 질서의 회복은 나쁜 지도자 한 사람을 교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거짓된 권력에 복종하게 만든 두려움과 이익, 왜곡된 언어와 제도, 잘못을 알면서도 침묵했던 관계까지 바로잡아야 한다.
잘못된 지도자 한 사람을 바꾸어도 그를 만들고 지지한 방식이 그대로 남으면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명령을 내린 사람뿐 아니라, 거짓을 정상으로 만들고 침묵을 보상한 조직의 습관도 바꾸어야 한다.
회복하려면 권력을 제한하는 규칙을 세우고 기록과 검증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동시에 “조직이 시켰다”는 말로 자신의 행동 책임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공동체에서 권력을 맡은 사람의 선의만 믿지 않아야 한다. 결정 과정을 기록하고, 이해충돌을 공개하며, 피해자가 안전하게 문제를 제기할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더불어 구조만 탓하지 않는다. 부당한 명령에 동조했던 말, 침묵, 행동 가운데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악한 지도자와 그 지도자를 움직이고 보호한 권력 구조를 함께 심판하신다.
24장 23절
: 해와 달의 빛이 물러나고 여호와의 왕권과 영광이 드러난다.
23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밝고 높아 보이는 존재도, 여호와의 영광 앞에서 자신이 빛의 근원이 아님을 드러낸다.
본문의 마지막은 무너진 땅이 아니라 왕이신 여호와께 시선을 돌린다. 해와 달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안정적이며 밝은 존재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자신의 빛을 내세우지 못한다.
21절에서 “높은 군대”가 심판받고, 23절에서는 여호와가 “만군의 여호와”로 불린다. 모든 군대와 권세와 천체는 여호와께 속하며 그분의 통치를 벗어나 독립할 수 없다.
“달과 해”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두 빛을 함께 부르는 표현이다. 둘의 수치는 실제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할 때 피조물의 빛이 희미해지는 모습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이다.
15절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명령하고, 20절에서는 죄악이 무거워 땅을 짓누르며, 23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를 둘러싼 싸움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결론 난다.
또한 우주 전체를 흔들던 장면이 “시온 산과 예루살렘”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로 모인다. 하나님의 보편적 왕권은 현실과 역사를 떠난 추상적 사상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영광으로 드러난다.
고대 서아시아에서 해와 달은 시간과 농사에 영향을 주는 천체일 뿐 아니라 신적 존재로 숭배되기도 했다. 이사야는 해와 달을 하나님의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물러나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단순히 다른 왕보다 더 강한 왕이 등장한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빛과 권력이 상대적인 위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지식, 기술, 돈, 정치권력, 종교 지도력은 모두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스스로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할 때 우상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빌린 권력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원래의 봉사 역할로 돌아가게 한다.
“왕이 되신다”는 말에는 심판과 구원이 함께 들어 있다. 하나님이 왕이 되시면 폭력적인 통치자는 낮아지고, 억눌린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밝아 보이는 지식과 기술과 명성과 권력도 스스로 빛을 만든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사회의 기반,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능력을 받아 사용한 것이다.
문제는 받은 힘을 자기 소유와 자기 영광으로만 사용할 때 생긴다. 회복은 능력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도자와 제도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는다. 받은 권한을 약자를 보호하고 진실을 드러내며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데 사용한다.
내가 의지하는 “해와 달”이 무엇인지 점검한다. 돈, 학력, 기술, 지도자, 조직, 인기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는 대상이 있는지 살핀다.
내가 맡은 권한이 빌린 빛이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인정한다. 공을 독차지하지 않고, 정보를 숨기지 않으며,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사용한다.
회개를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대신 맡기지 않는다. 부모, 지도자, 시대, 조직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더라도 내가 선택하고 반복한 행동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한다.
모든 빌린 빛이 물러날 때,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며 영광의 근원이심이 드러난다.
이사야 24장 14절부터 23절 묵상을 마무리하며…
이사야 24장 14절부터 23절 묵상을 하면서, 무너지는 현실을 정직하게 통과하여 하나님만이 왕이심을 드러내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찬송은 고통을 잊는 노래가 아니라 배신과 심판이 마지막 말이 아님을 선언하는 노래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어 땅을 무너뜨리도록 방치하시는 무관심한 분도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을 흔드시는 변덕스러운 분도 아니다.
사람들이 법과 경계와 약속을 깨뜨린 결과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악을 보호하던 하늘과 땅의 권력에 책임을 물으신다. 인간은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배신을 멈추고 진실을 말하며 약속을 회복할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해결된 것처럼 노래하며 피해자의 탄식을 덮지 않고, 잘못이 드러났을 때 도망하지 않아야 한다. 받은 권한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내가 무겁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내 체면인지 살피고, 깨뜨린 약속 하나를 실제 행동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따름&드림]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전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세속적인 것들에 의지하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옵소서.
잘못에 대해서도 피하려고 했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죄악의 무게가 우리의 삶을 누른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 눈에 빛나는 것들에 의존하게 마시고, 하나님의 실존을 깨닫게 하소서.
아직도 물질적인 것에 매몰된 우리가 있습니다.
그들을 구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유와 평안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 사회가 개인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뤄지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사야 24장 14절부터 23절 묵상 성경 큐티 글쓰기는, 개인적으로 정리한 신앙적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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