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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0장 20절부터 34절 묵상은 ‘두려움을 무력화 시키는 방법: 당신이 의지한 힘이 당신을 때리기 시작할 때‘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 26/7/29, 857일차,
목차
[살핌]
이사야 10장 20절부터 23절 묵상
: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옴
이사야 10장 24절부터 34절 묵상
: 멍에는 벗겨지고 교만한 숲은 베임
[새김]
두려움을 무력화 시키는 방법
: 당신이 의지한 힘이 당신을 때리기 시작할 때
이사야 10장 20절부터 34절 묵상의 배경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그들의 교만과 잔혹함까지 인정하신 것은 아니다. 도끼가 주인보다 자랑할 수 없듯이, 앗수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
앗수르에게 남은 것은 심판의 흔적이지만,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복의 씨앗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남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의지하느냐이다.
하나님은 높아진 제국의 숲은 베시고, 잘린 듯한 이새의 줄기에서는 새싹을 자라게 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큰 힘보다 자신을 의지하는 작은 시작을 세우신다.

10장 20절
: 의지의 대상이 바뀜
20절이 말하는 참된 회개는 어려울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삶을 맡기는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을 의지해 안전을 얻으려 했지만, 그 힘은 오히려 자신을 때리는 권력이 되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선택과 두려움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잘못된 의존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빈자리를 돈, 사람, 권력, 통제 욕구로 다시 채우면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제도와 도움은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
이 절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 회복으로 볼 수 있다. 인간적 동맹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동맹과 제도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두려움은 외부 권력에 마음의 중심을 내어 준다. 하지만 진실한 의지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시 정렬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는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에서 ‘무엇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로 질문이 바뀌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적어 본다.
그것이 사라질 때 하나님까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도움이 아니라 궁극적인 의지 대상이 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남은 자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 자기 삶의 무게를 다시 맡기는 사람이다.
10장 21절
: 살아남음이 아니라 돌아옴
21절에서 남은 자는 단순히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다. 삶의 방향을 돌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다.
“쉐아르 야슈브”는 이사야의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이사야 7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 아들과 함께 아하스 왕을 만나라고 하셨다. 그 아이의 이름 자체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살아 있는 예언이었다.
이 절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단순히 고향으로 귀환한다는 뜻을 넘어선다. 바로 다음에 “능하신 하나님께로”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위치의 회복보다 관계의 회복이 우선이다.
회개는 후회보다 돌아옴이다. 죄로 흩어진 인간의 생각, 감정, 행동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회개는 나쁜 감정에 오래 머무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삶의 방향을 실제로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구체적인 행동 하나로 바꿔야 한다. 미루었던 기도, 끊어야 할 거짓말, 사과해야 할 사람, 회복해야 할 예배 가운데 하나를 오늘 시작한다.
회개는 죄를 바라보며 멈추는 것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10장 22절~23절
: 언약과 공의의 긴장
22절은 언약 백성이라는 이름과 많은 수가 자동으로 구원을 보장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기에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거룩하심에 신실하시기에 불의를 심판하신다. 심판은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죄에 대한 공의로운 결정이다.
남은 자는 스스로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고 그분께 돌아가는 삶이 그 표지이다.

심판을 거짓된 자아와 교만, 수적 자랑을 걸러 내고 언약에 응답하는 중심을 보존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자기 확신이 무너지고, “나는 하나님께 돌아가고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만 남는다.
교회 규모와 봉사 경력, 신앙생활 기간과 가문의 전통은 오늘의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보다 지금 누구를 의지하며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신다. 수적 크기보다 진실한 돌이킴이 더 중요하다.
23절의 심판은 통제되지 않은 파괴가 아니다. 악과 불의에 끝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이다. 심판이 작정되었다는 말은 회개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남은 자를 보존하시며, 심판을 통해 악이 끝없이 퍼지는 것을 막으신다.
심판은 다른 사람의 몰락을 즐기는 기회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돌아보라는 경고이다.
인간 내면에서도 하나님은 파괴적인 습관을 적당히 다듬는 데 그치지 않고 끝내기를 원하신다.
자기기만, 중독적 욕망, 반복되는 폭력적 언어와 타협할 때 회복은 시작되지 않는다. 거룩한 심판은 생명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끝내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끝내시기를 바라면서도 내가 계속 먹이를 주고 있는 습관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회개는 “언젠가 달라지겠다”는 소망을 오늘의 경계 설정으로 바꾸는 일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생명을 향한 길을 막는 악에 끝을 정한다.
10장 24절~27절
: “두려워하지 말라”
24절에서 하나님은 위협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 위협보다 먼저 백성의 언약적 정체성을 확인해 주신다.
사람은 실제 공격뿐 아니라 “너는 끝났다”는 적의 말에도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움에 지배되어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믿음은 위험이 없다고 우기는 태도가 아니라, 위험이 최종 권세가 아님을 믿는 태도이다.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보다 먼저 나오는 말은 “내 백성아”이다. 아직 막대기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구원은 먼저 상황이 바뀌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듣는 데서 시작한다.
세속적인 힘은 공포와 억압으로 사람을 작게 만든다. 그러나 거룩한 힘은 두려움에 경계를 세워, 두려움이 인간 전체를 차지하지 못하게 한다.
“내 백성”이라는 음성은 흩어진 마음을 언약의 중심으로 모은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두려움이 나의 이름과 정체성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즉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가 강대국에 대한 노예적 공포를 밀어낸다.
“나는 두렵지 않다”고 감정을 부인하지 않는다. 먼저 무엇이 두려운지 하나님께 말한 뒤, “그러나 나는 그 두려움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위험 부정이 아니라 소속 회복이다.

25절에서 하나님의 징계에는 목적과 끝이 있다. 하지만 교만한 압제자의 폭력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감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즉시”라고 말씀하지 않고 “조금 더”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가장 어려운 시간은 약속을 받았지만 아직 상황이 바뀌지 않은 간격이다.
이때 백성은 하나님의 지연을 하나님의 부재로 오해하기 쉽다.
하나님의 진노는 통제되지 않은 감정이 아니다. 징계가 목적을 이루면 멈추고 회복의 길을 여신다. 반면 자신을 절대화한 앗수르는 그 폭력으로 심판받는다.
그러므로 내면에서는 현재의 고통을 “내 인생 전체”로 확대하는 생각을 끊어야 한다. “지금 힘들다”와 “영원히 끝났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믿음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을 하나님의 끝맺으심 아래 두는 것이다.
힘든 상황을 말할 때 “항상”, “절대로”, “영원히”라는 표현을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지 살핀다. 현실을 축소하지 않되,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론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을 “영원히”로 오해하지 않는다.
26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을 상상하라고만 하지 않고, 이미 행하신 구원을 기억하게 하신다.
“오렙 바위”는 사사기 7장에서 미디안 지휘관 오렙이 패배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의 핵심은 수적으로 약한 기드온의 군대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한 미디안을 이겼다는 것이다.
“바다를 향한 막대기”는 출애굽 당시 홍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을 때리던 이집트의 권세가 바다에서 무너졌다.
이사야는 미디안과 출애굽이라는 두 구원 기억을 현재의 앗수르 위기에 겹쳐 놓는다.
24절에서는 앗수르가 막대기를 들었다. 26절에서는 하나님이 막대기를 드신다. 같은 이미지가 뒤집히며, 억압자가 자기 소유라고 생각한 권력이 사실은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 약한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기억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재의 두려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신앙 행위이다.
바위는 굳어 버린 두려움과 저항을, 바다는 길이 보이지 않는 혼돈을 나타낼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모든 장애물을 부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할 때 굳은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혼돈 속에서 다음 순종의 길이 드러난다.
변화는 “나는 포위되었다”는 기억만 반복하다가 “하나님이 전에 건지셨다”는 기억을 되찾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과거에 나와 공동체를 붙드신 사건 세 가지를 기록한다.
현재 문제와 똑같은 해결을 요구하기보다, 그 사건들이 보여 준 하나님의 성품을 기도의 근거로 삼는다.
두려움이 과거의 상처만 기억하게 할 때,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도 함께 기억한다.

27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추상적인 위로가 아니다. 어깨와 목을 짓누르는 실제 억압의 제거이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멍에를 잘 견디는 기술만 가르치지 않으신다. 때가 되면 멍에 자체를 부수신다.
목은 머리의 깨달음이 몸의 행동으로 내려가는 통로처럼 볼 수 있다. 교만과 완고함은 목을 굳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마음과 행동으로 흐르면 거짓된 권세의 멍에가 힘을 잃는다.
하나님의 지혜와 겸손이 내면의 노예적 구조를 무너뜨린다.
이를 토대로 나를 계속 짓누르는 멍에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름 붙여본다.
죄책감, 사람의 인정, 과도한 성과 압박, 중독, 폭력적 관계라면 혼자 참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와 공동체, 상담과 필요한 보호를 함께 구한다. 하나님은 눌린 어깨를 위로하실 뿐 아니라 그 어깨를 누르는 멍에를 깨뜨리신다.
10장 28절~32절
: 침략군이 가까이 다가옴
28절에서 침략군의 빠른 이동은 위협이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본문은 긴 설명을 생략하고 군대가 한 지점씩 빠르게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믿음은 위협이 가까워지는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얏을 지났고, 미그론을 지났고, 이제 믹마스에 장비까지 두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다.
내면의 적도 대개 한순간에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작은 불안이 생각을 지나고, 반복되는 생각이 마음에 장비를 쌓고, 마침내 행동과 관계를 지배한다.
따라서 영적 분별은 문제가 예루살렘까지 온 뒤에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주변에서 어떤 두려움과 욕망이 이동하고 있는지 일찍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외부의 모든 위협을 악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파괴적인 생각이 내면에 거점을 만들지 못하도록 진리로 살피는 것이다.
최근 반복되는 생각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떤 감정을 지나며,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기록을 해봐야 한다.
파괴적인 힘이 마음의 중심에 도착하기 전에 그 이동 경로를 알아차려야 한다.
29절에서 한 공동체의 공포는 개인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이웃 공동체 전체로 퍼질 수 있다.
“사울의 기브아”라는 표현은 과거 이스라엘 왕권의 기억을 불러온다. 왕의 도시라는 역사적 명성도 현재의 앗수르 군대를 막아 주지 못한다. 과거의 영광은 현재의 신뢰와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
두려움은 전염된다. 한 사람이 근거 없는 확신을 퍼뜨릴 때도 공동체가 위험해지지만, 한 사람이 확인되지 않은 공포를 계속 확대할 때도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다.

“고개를 넘는다”는 외부의 정보가 내면의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밖에 있던 위협이 상상과 감정을 통해 몸의 떨림이 된다.
거룩한 힘은 감정을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공포가 무제한으로 퍼지지 않도록 경계를 세우는 능력이다.
사실을 확인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며, 필요한 행동을 정하는 것이 내면의 경계를 세우는 실제 방법이다.
공동체 안에서 불안을 전할 때 사실, 추측, 감정을 구분한다. 두려움을 숨기지 않되 확인되지 않은 말을 확정된 사실처럼 퍼뜨리지 않는다.
두려움을 솔직히 나누되, 공포가 공동체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3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쟁을 왕과 장군의 이야기로만 기록하지 않고, 위협받는 작은 성읍들의 울음도 들려준다.
성경은 강한 자의 진군만 기록하지 않는다. 피난하는 사람, 울부짖는 마을, 떨고 있는 주민을 본문의 중심에 놓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국가의 승패만이 아니라 이름 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과 관련된다.
“목소리”는 안에 감춰져 있던 고통이 밖으로 드러나는 통로이다.
말하지 못한 두려움은 내면에서 형태 없이 커지지만, 하나님 앞에서 소리로 표현될 때 기도와 도움 요청으로 바뀔 수 있다.
변화는 고통을 아름다운 말로 꾸미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가련하다”는 탄식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울음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다. 관계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표시가 될 수 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가 누구인지 살핀다. 리더의 설명보다 피해자와 약자의 경험을 먼저 듣는 것이 이 본문의 흐름에 맞는 공동체적 태도이다.
하나님은 침략자의 큰 소리만 아니라 고통받는 작은 마을의 울음도 들으신다.
31절에서 성경은 피난과 도망을 무조건 믿음 없음으로 정죄하지 않고, 위험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주민들의 현실을 기록한다.
본문은 “믿음이 있으면 도망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실제 위험에서 피하고 보호를 구하는 행동은 불신앙과 같지 않다.
중요한 것은 피난 자체를 궁극적인 구원으로 여기지 않고, 피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물러나고 경계를 닫는 것은 거룩한 힘의 기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숨어 있는 것이 회복의 완성은 아니다. 흩어진 생각과 감정을 안전하게 모은 뒤, 다시 하나님과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내면의 변화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과 삶을 다시 세우는 것을 구분할 때 시작한다.
폭력이나 학대, 심각한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무조건 참고 버티라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한 장소와 전문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믿음에 반대되는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위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피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이다.
32절에서 침략자의 손이 예루살렘을 향할 만큼 위기가 가까워졌지만, 그 손이 역사의 마지막 손은 아니다.
이 절에는 아직 하나님의 직접 행동이 없다. 적은 쉬고, 바라보고, 손을 흔든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그러나 다음 절의 첫 단어가 “보라”이다. 적이 시온을 향해 손을 드는 순간, 독자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린다. 하나님은 늦으신 것처럼 보여도 앗수르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범위를 이미 알고 계신다.
손은 내면의 의지가 행동으로 뻗어 나가는 통로이다. 앗수르의 손은 “내가 지배하겠다”는 교만한 의지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그러나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교만한 의지는 모든 것을 자기 영역으로 만들려 하지만, 거룩한 중심 앞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내면에서는 통제하려는 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머무는 훈련이 필요하다.
문제가 나를 완전히 이긴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성급히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믿음의 핵심은 상황이 뜻대로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어떤 힘도 하나님의 통치를 넘어설 수 없다는 데 있다. 위협이 가장 가까워진 순간에도 적의 손이 하나님의 손보다 크지는 않다.
10장 33절~34절
: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개입
33절에서 침략자의 행군이 절정에 이른 순간,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교만한 권세를 행동의 주체에서 심판의 대상으로 바꾸신다.
28절부터 32절까지 침략자는 계속 문장의 주어였다. 그가 오고, 지나고, 장비를 두고, 숙영하고, 손을 흔든다. 그러나 33절에서는 “주 만군의 여호와”가 주어가 되고, 앗수르는 잘려 나가는 나뭇가지가 된다.
현실이 바뀌기 전에 먼저 관점의 주어가 바뀐다. 믿음은 “앗수르가 무엇을 하는가”만 묻던 시선을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로 돌린다.

하나님은 강한 자가 강하다는 이유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높음”은 자신이 받은 힘을 자기 절대화와 타인 억압에 사용하는 교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약자를 살리기 위해 높아진 억압의 가지를 자르신다.
가지치기는 힘의 기능으로 볼 수 있다. 생명을 미워해서 나무를 자르는 것이 아니다. 교만하게 뻗어 전체 생명을 해치는 부분에 경계를 세우는 것이다.
내면의 “높은 가지”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야 안전하다고 믿는 욕망이다.
하나님의 가지치기는 인간의 존엄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거짓된 우월감과 자기 과장을 제거하여 참된 생명이 다시 흐르게 하는 과정이다.
내가 힘을 얻었을 때 누구를 작게 만들고 있는지 살핀다. 하나님께서 잘라 내시려는 교만을 스스로 붙잡고 보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등장하시면 높아 보이던 권세는 한순간에 잘려 나갈 가지가 된다.
34절에서 인간이 영원할 것처럼 세운 거대한 권력 구조도, 하나님 앞에서는 베어질 숲에 불과하다.
앗수르는 레바논의 울창한 숲처럼 장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높음과 빽빽함은 영원함을 뜻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문장이다. 이사야 11장 1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시작한다. 교만한 제국은 울창한 숲이지만 베이고, 겉으로 잘린 듯한 다윗의 집에서는 작은 새싹이 나온다.
빽빽한 숲은 서로 얽힌 욕망, 두려움, 자기변명으로 묵상할 수 있다. 각각은 작아 보여도 함께 얽히면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내면의 숲이 된다.
하나님의 베심은 인격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 아니다. 거짓된 구조를 잘라 작은 거룩한 생명이 자랄 공간을 여는 일이다.
내면의 변화는 내가 크게 보이는 데서 오지 않고, 하나님이 심으시는 작은 순종을 보호하는 데서 시작한다.

한꺼번에 거대한 변화를 만들려 하기보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작은 새싹을 찾아야 한다.
하루의 정직한 기도, 한 번의 사과, 한 사람을 돌보는 행동, 반복되는 유혹 앞의 작은 거절이 새 시대의 시작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숲을 베시고 그 자리에 작지만 거룩한 새 생명을 일으키신다.
이사야 10장 20절부터 34절 묵상을 마무리하며…
이사야 10장 20절부터 34절 묵상하면서, 앗수르는 크고 울창한 숲처럼 보이지만 생명의 미래를 품지 못한다.
반면 잘린 그루터기 같은 이새의 집에서는 새싹이 돋아난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크기를 자랑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작은 순종에서 시작한다.
변화는 내가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대상과 매일의 작은 선택을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먼저 “이것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살핀다. 돈과 사람과 제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원자가 되면 결국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된다.
번째로 두려움을 부인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 뒤 “이 위협이 실제이지만 최종 권세는 아니다”라고 하나님의 약속 아래에서 다시 해석한다.
셋째로는 내가 익숙해져 버린 압제가 무엇인지 살핀다. 반복되는 죄, 인정 중독, 과도한 책임감, 폭력적 관계를 “원래 인생은 이런 것”이라며 정상화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결심보다 오늘 가능한 작은 순종을 시작한다. 남은 자의 회복은 화려한 선언보다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따름&드림]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도 귀중한 말씀을 전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세속적인 힘에 지배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오직 하나님 뜻만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두려움을, 거룩한 힘으로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교만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약자를 억압했던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의 외침을 듣게 하소서.
우리의 교만함을 잘라내시고, 겸손의 새싹이 자라게 하소서.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사야 10장 20절부터 34절 묵상 성경 큐티 글쓰기는, 개인적으로 정리한 신앙적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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