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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 묵상은 ‘공동체 내부에 적을 찾는 법: 악이 어떻게 법을 만들까?’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 26/7/27, 855일차,
목차
[살핌]
이사야 9장 8절부터 17절
: 교만과 거짓 인도가 회개를 막다
이사야 9장 18절부터 10장 4절
: 악이 공동체를 태우고 법이 약탈의 도구가 되다
[새김]
공동체 내부에 적을 찾는 법
: 악이 어떻게 법을 만들까?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 묵상의 배경
이사야 9장 1절부터 7절은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왕을 약속한다. 그러나 9장 8절부터 10장 4절은 그 약속과 정반대인 현실을 보여 준다. 지도자는 거짓을 가르치고, 백성은 서로를 해치며, 관리들은 법을 이용해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다.
이 불의 때문에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등장한다. 그러나 앗수르의 교만과 잔혹함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침략자도 심판하신다.
본문은 진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다고 끝나지만, 이후에는 남은 자가 하나님께 진실하게 돌아온다. 심판의 최종 목적은 불의의 제거와 남은 자의 정결과 회복에 있다.
이사야 9장 8절~12절
: 우리가 다시 세우리라
8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는 정보가 아니다. 역사 속에 도착해 현실을 판단하고 결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시는 앗수르나 아람의 군대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사건의 참뜻은 군사력이나 경제 상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말씀은 위에서 구체적인 현실과 행동의 자리까지 내려온다. 진리가 생각에만 머물면 아직, 삶의 회복이 안 된다. 말씀을 받아 행동하면 회복의 통로가 된다. 하지만 거부하면 같은 말씀이 곧 엄격한 심판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을 정보로만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토대로 실제로 사과하거나, 고치고, 멈추고, 시작해야 할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현실적 사건이다.
9절에서 백성은 재난을 겪고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한다. 문제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사건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 뒤 즉시 백성의 말이 등장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본문은 하나님의 해석과 인간의 자기합리화를 대조한다.
이것은 자아가 진리를 차단하는 상태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우선하고,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고집과 아집이 된다. 진리의 빛을 가리는 껍데기이다.
자아가 커지면 하나님과 이웃을 받아들일 공간이 사라진다. 실패 뒤에 곧바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기보다, 먼저 무엇을 잘못 보았는지 물어야 한다. 고난 자체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겸손히 해석할 때 변화가 시작된다.

10절에서 벽돌과 돌무화과나무는 상대적으로 흔한 재료이다. 다듬은 돌과 백향목은 더 비싸고 견고한 재료이다. 백성은 무너진 원인을 회개로 다루지 않는다. 더 비싸고 강한 재료로 이전 체제를 복원하려 한다.
반복되는 “우리가”라는 말은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더 크게 재건하려는 교만을 드러낸다.
성경이 꾸짖는 것은 재건 자체가 아니라 회개 없는 재건이다. 불의한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건물과 예산과 권력만 강화하면, 더 좋은 재료는 더 큰 죄를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돌과 나무를 삶의 구조와 제도를 담는 그릇으로 볼 수 있다. 백성은 겉의 구조를 더 강하게 바꾸지만, 그 안의 교만은 그대로이다. 잘못된 마음과 관계의 회복 없이 제도와 자원만 강화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담겨지지 않는다. 자아를 보호하는 껍데기인 고집 아집만 더 단단해진다.
실패 뒤에 새 프로그램과 건물, 직책과 기술부터 늘리기보다 잘못된 동기와 관계를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진정한 회복에는 회개와 책임 인정이 함께 있어야 한다. 회개 없는 개선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더 견고해진다.
11절에서 백성이 하나님보다 의지한 정치적 세력은, 안전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심판의 통로가 된다.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국제관계가 도리어 그들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힘은 경계와 정의를 세워서, 보호를 하게 된다. 하지만 힘이 사랑과 균형의 조화를 잃으면, 보호가 아니라 적대와 충돌로 변한다.
인간 내면에서도 두려움과 통제욕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중심을 잃으면, 안전을 위한 수단이 오히려 관계를 파괴하는 무기가 된다.
인맥, 돈, 지위, 강한 사람과의 관계가 책임과 진리를 대신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그것에 도움을 받는 것과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한 안전장치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
12절에서 이스라엘은 사방의 공격을 받지만, 백성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에 심판은 끝나지 않는다.
심판의 목적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백성이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다.
본문에서 ‘입’은 중요한 상징이다. 본래 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생명을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입은 교만과 거짓으로 왜곡된다.
그러면 생명을 나누는 기관인 입이, 타인을 삼키는 욕망의 기관이 된다. 즉 사람을 살리는 대신 서로를 해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변화는 말을 단정하게 꾸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입을 움직이는 내면의 탐욕과 우월감을 고치는 데서 시작된다.
위기에서 가장 먼저 “누가 나를 공격했는가”만 묻지 말고, “이 위기 속에서도 내가 듣지 않으려는 진리는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외부의 공격보다 더 깊은 문제는 공격을 겪고도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사야 9장 13절~17절
: 그 백성이 돌아오지 아니하며
13절은 심판이 반복되는 이유를 밝힌다. 백성이 자신들을 치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그분의 뜻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는 죄책감을 느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고, 잘못된 행동과 관계를 실제로 고치는 일이다.
여기서 재난을 피해자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이유를 직접 알려 주셨다. 그래서 재난의 의미를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일어나는 모든 재난의 원인을 하나님께 직접 들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고난을 피해자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유대에서 회개를 뜻하는 테슈바는 본래 자리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이는 심판을 마술적으로 없애는 행위가 아니다. 심판을 만든 왜곡을 실제로 고치는 회복이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고난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야 할 자리와 고쳐야 할 행동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기도와 함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회복하며, 새로운 순종을 시작하는 것이다. 백성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도 돌아서지 않았다.
14절은 높은 지도자부터 평범한 백성까지 사회 전체가 심판받는 모습을 보여 준다.
‘머리와 꼬리’, ‘높은 가지와 낮은 갈대’는 서로 반대되는 두 끝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루 사이에”라는 말은 오래된 질서도 불의가 쌓이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붕괴의 책임은 지도자에게만 있지 않다. 지도자는 거짓을 가르치고, 백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일상에서 반복한다. 책임의 크기는 다르지만 사회 전체가 왜곡된 질서를 유지하는 데 참여한 것이다.
머리는 생각과 판단을, 꼬리와 갈대는 일상의 행동을 상징한다. 생각은 신앙을 말하면서 생활이 불의하다면, 생각과 행동 사이에 신앙이 끊어진 상태이다.
회복은 신앙과 일상, 예배와 경제생활, 신앙고백과 인간관계를 다시 연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한 사람에게만 판단을 맡기지 않고, 누구나 질문하고 검증하며 잘못을 알릴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15절에서 사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을, 무지한 백성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존경받는 지도자와 거짓을 가르치는 종교인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나이와 직함, 명성이 그 가르침의 진실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를 ‘꼬리’라고 부른 것은, 그가 앞에서 진리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권력과 여론을 뒤따르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지도자의 기준은 지위, 인기, 학력,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진실함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백성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전한다면, 선지자의 직함이 있어도 거짓을 가르치는 자이다.
머리는 지혜와 분별을 상징할 수 있다. 참된 지혜는 진리와 연결될 때만 생명을 전달한다. 머리의 지식과 입의 말이, 진리에서 분리되면 영적 질서가 뒤집힌다. 즉 꼬리가 공동체를 움직이게 된다.
내면의 회복은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는 진리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데서 시작된다.
설교와 가르침을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명성만 바라보면 안 된다. 본문에 충실한지,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거짓을 가르치는 종교적 권위는 공동체를 이끄는 머리가 아니라 파멸로 끌고 가는 꼬리이다.
16절은 지도자의 잘못된 가르침이, 그를 따르는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지도자와 추종자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한 사람의 왜곡된 판단이 많은 사람의 삶과 방향을 흐트러뜨린다.
지도자는 공동체에 뜻과 가치가 전달되는 통로로 볼 수 있다. 이 통로가 휘어지면, 작은 왜곡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많은 사람의 삶을 뒤튼다.
지도자는 자신이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전달자임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공동체가 지도자를, 검증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지도자는 반대 의견과 질문을 막지 말아야 한다.
따르는 사람도 판단을 지도자에게 모두 맡겨서는 안 된다. 성경 본문과 사실, 지도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거짓 지도자는 자신만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다.
17절은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악한 행동과 타락한 말로 드러난다. 그 결과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고아와 과부까지 재앙을 피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들이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가장 약한 사람조차 지켜 주지 못할 만큼 깊이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현실은 생각과 욕망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내면의 교만과 탐욕이 정화되지 않으면, 입은 그것을 현실로 끌어낸다. 이것은 곧 다른 사람의 마음과 공동체 분위기를 오염시킨다.
그러므로 말의 회복은 단순히 거친 표현을 부드럽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입을 움직이는 욕망을 진실, 겸손, 책임으로 돌이켜야 한다.
일주일 동안 자신의 말을 점검할 수 있다. 과장, 조롱, 음담, 타인에 대한 단정, 책임 회피,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말 뒤에 있는 두려움이나 우월감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마음의 불경건은 악한 행동과 망령된 말로 흘러나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한다.
이사야 9장 18절~21절
: 사람이 자기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18절은 악이 사람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작은 도구가 아니라, 주변을 삼키며 커지는 산불과 같다고 말한다.
가시덤불에서 시작한 불이 숲 전체로 번지듯, 작은 욕망과 거짓은 가정과 공동체, 지도층과 나라 전체로 퍼질 수 있다. 연기가 솟는 모습은 파괴가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만큼 커졌음을 보여 준다.
불은 잘못을 끊고 경계를 세우는 힘과 연결된다. 여기에 사랑과 자비와 조화를 이루면 정의를 세우는 힘이 된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히면, 사람과 관계를 태우는 힘으로 변한다. 변화는 분노와 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의와 자비를 섬기도록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다.
큰 붕괴는 작은 거짓말, 반복되는 조롱, 숨겨진 돈 문제, 풀지 않은 원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초기에 바로잡지 않으면, 악은 점점 커져 사람과 관계, 제도까지 함께 무너뜨린다.

19절은 공동체가 만든 악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자기 파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백성이 선택한 탐욕과 폭력이, 결국 자신들을 태우는 불이 된 것이다. 자비를 버린 공동체는, 자비가 사라진 현실로써 심판을 경험한다.
반복된 선택이 개인과 공동체의 방향을 만든다. 이는 생각만으로 현실이 바뀐다는 뜻이 아니다.
자비와 책임을 선택하면 파괴가 줄어든다. 하지만 타인을 방해물이나 제거 대상으로 여기면, 엄격한 심판이 드러날 자리가 커진다.
갈등 속에서 상대를 조롱하거나 한 집단 전체를 악으로 단정하는 말을 멈춰야 한다. 서로를 향한 긍휼이 사라지면, 문제 해결의 마지막 가능성도 사라진다. 자비를 잃은 공동체는 결국 서로를 공격하며 함께 무너진다.
20절은 절제되지 않은 욕망이 아무리 많이 차지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미래까지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자비와 책임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서는 바른 질서를 만들 수 없다. 두 힘은 균형과 조화 안에서 함께 작동해야 한다.
더 많은 돈과 인정, 영향력을 얻으면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을 점검해야 한다.
욕망에 한계를 두지 않으면 성공을 위해 가족과 동료, 공동체와 양심까지 소모하게 된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은 남을 해친 뒤 결국 자기 삶까지 무너뜨린다.

21절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서로 싸우다가도 유다를 공격할 때만 힘을 합친다.
두 지파는 모두 요셉에게서 나온 형제이므로, 이들의 싸움은 한 몸이 스스로를 해치는 것과 같다. 앞 절의 “자기 팔을 먹는다”는 비유가 형제 지파의 내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같은 대상을 미워하기 위해 뭉치는 것은 진정한 연합이 아니다. 참된 연합은 내부의 상처와 갈등을 외부에 떠넘기려고 하면 안 된다. 공동의 진리와 책임을 중심으로, 서로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내면의 상처와 갈등을 해결하지 않은 채 외부 집단을 비난하면 분열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폭력으로 이어진다.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야 하는 것은 공동의 적이 아니라 공동의 진리와 책임이다.
이사야 10장 1절~4절
: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이사야 10장 1절은 죄가 개인의 잘못을 넘어 법과 행정 절차에 들어갈 때 더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들은 실수로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라, 불의를 반복해서 만들고 공식 문서로 굳힌 사람들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 인간이 만든 불의한 기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의 진실을 드러내지만, 권력자의 문서는 거짓을 공식적인 질서로 만든다.
문자는 세계의 질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이 관점에서 법과 기록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틀이다.
진실한 문자는 질서와 생명을 세운다. 하지만 불의한 문자는 약자를 가두는 왜곡된 현실을 만든다. 그러므로 문서의 회복은 정확한 표현뿐 아니라 공정한 결과까지 요구한다.
따라서 교회와 조직의 규정, 재정 절차, 징계 기준이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 결과를 만드는지 살펴야 한다.
문서가 중립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 결과도 공정하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불의가 문서와 제도가 되면 개인의 악보다 훨씬 넓고 오래 사람을 해친다.

2절은 법의 겉모습보다 그 법이 약한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법은 우연히 불공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빼앗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피해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며 그들의 권리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신다.
약자의 목소리가 법에서 지워질 때, 현실 속 왕권과 질서가 왜곡된다. 약자를 다시 보이게 하고 그 권리를 회복하는 것은, 사회적 정의인 동시에 가려진 하나님의 임재를 존중하는 회복이다.
정책의 의도만 아니라 실제 영향도 확인해야 한다. 비용, 복잡한 서류, 정보 부족, 항의하기 어려운 구조가 힘없는 사람을 사실상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법이 강한 사람에게 얼마나 편리한지가 아니라 약한 사람의 권리를 얼마나 지키는지를 보신다.
3절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질문으로 권력자들이 의지하던 돈과 지위, 인맥이 심판의 날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함을 드러내신다.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에게 도망할 것인가”, “재산을 어디에 맡길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들이 믿었던 모든 탈출구를 하나씩 막는다.
심판은 감추어진 동기와 관계의 실상이 드러나는 때이다. 타인의 것을 빼앗아 쌓은 명예와 재산은, 진실한 삶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위기 앞에서 무너진다.
직책과 재산이 사라져도 남을 성품과 관계를 돌아봐야 한다. 잘못 얻은 이익을 돌려주며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약탈로 쌓은 영광은 책임을 묻는 날에 누구도 지켜 주지 못한다.
4절에서 회개를 거부한 권력자들에게 남은 것은, 포로가 되어 몸을 굽히거나 죽은 자들 사이에 쓰러지는 일뿐이다. 다른 사람을 억눌렀던 자들이 이제 자신도 강제로 낮아진다.
이 절의 후렴은 앞 단락 전체를 마무리한다. 교만한 재건과 거짓 지도력, 형제끼리의 폭력과 불의한 법이 모두 같은 심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높인 거짓 자아가 무너지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제로 낮아지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참된 회개는 심판이 모든 선택을 빼앗기 전에 해야 한다. 이는 스스로 진실 앞에 몸과 마음을 낮추고, 빼앗은 것을 돌려주며, 왜곡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위기가 닥친 뒤 선택지가 사라질 때까지 미루지 말아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일은 아직 선택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낮아지지 않은 사람은 결국 심판 앞에서 강제로 낮아진다.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 묵상을 마무리하며…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 묵상을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말과 지도력, 관계와 법을 차례로 왜곡해 공동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을 드러내지만, 이를 거부한 권력자들은 불의를 법과 제도로 굳힌다.
거짓된 말은 폭력과 약탈을 정당화하고, 공동체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탐욕과 분열로 무너진다. 하나님은 약자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빼앗은 사회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을 떠난 힘은 자기 파괴로 흐르지만, 하나님의 정의 아래 놓인 힘은 약자를 보호한다.
개인의 회개는 실패 뒤에 더 강해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방향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무엇이 무너졌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자랑과 조롱, 과장과 근거 없는 말을 멈추고, 기도와 함께 사과와 배상, 부당한 이익의 반환으로 책임져야 한다.
또한 돈과 인정, 성취를 위해 가족과 건강, 양심까지 희생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하며 욕망에 경계를 세워야 한다.
[따름&드림]
오늘의 기도
하나님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일깨워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세속적인 영광을 쫓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지금 이 세상에는 약자들을 위한 법과 제도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스스로를 자멸하게 됨을, 깨닫게 하시 옵소서.
우리가 약자를 돌아보고, 하나님 말씀이 진정한 성공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과 자비가 함께하는 힘을 알게 하소서.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진실된 회개를 실천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사야 9장 8절부터 10장 4절 묵상성경 큐티 글쓰기는, 개인적으로 정리한 신앙적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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