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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큐티 성경 묵상 글쓰기, 26/7/10, 838일차
시편 10편 1절부터 18절 묵상은 악인의 세계관과 하나님의 정의를 함께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성경 큐티에서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죄를 짓는 이유, 그리고 악한 자들의 잘못된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목차

[살핌]
시편 10편1절부터 11절
: 악인의 세계관과 약자 사냥
시편 10편12절부터 18절
: 하나님의 개입 요청과 왕권 고백
[새김]
교회 다니면서도 죄 짓는 이유
: 악한 자들이 믿음은 무엇인가?
시편 10편1절부터 18절 묵상 본문 배경
시편 9편은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 일을 찬양하는 흐름이 강하다. 그러나 시편 10편은 현실 속에서 악인이 여전히 활개 치는 장면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두 시를 함께 보면 긴장이 분명해진다.
시편 9편은 말한다.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시편 10편은 묻는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악인이 심판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가.”
시편 11편은 다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며, 악인이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향해 화살을 쏘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따라서 시편 9~11편의 흐름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신앙 → 현실 속 정의 지연의 고통 → 여호와께 피하는 신뢰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는 착각
시편의 첫 단어 “왜”는 답을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현실을 재판정에 올리는 말이다. 여기서 “멀리 계신 하나님”과 뒤에 나오는 “숨어 있는 악인”이 대조된다. 하나님은 숨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악인은 실제로 숨어서 폭력을 저지른다.
1절은 신적 빛의 부재가 아니라 빛의 은폐를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다. 다만 질문이 하나님을 떠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호소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2절에서 “교만”은 gaʾăwat rāšāʿ, 곧 악인의 높아진 자기 인식이다. 인간이 자신을 절대 왕처럼 세우면 신적 통치의 통로가 막힌다. 여기서 악인은 받은 힘을 흘려보내지 않고 자기 지배로 봉쇄한다.
쉽게 말하면, 교만은 “내가 주인이다”라는 착각이 약자를 향한 폭력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즉 약자를 괴롭히는 구조는 대개 노골적 폭력보다 “나는 당연히 위에 있다”는 자기 확신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인간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강력한 악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다 보면 원래 안 그랬던 사람이 변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인상도 변한다. 이는 종교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높은 자리를 두려워한다.

시편 10편 3절에서 도둑질한 것으로 종교적 축복을 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즉 불의한 소유 위에 종교 언어를 덧씌우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신성 모독이다.
악인은 “욕망 → 취득 → 축복 언어 → 하나님 멸시”의 순서로 움직인다. 이것은 죄가 단순히 금지된 것을 갖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소유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언어까지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욕망 자체가 악은 아니다. 욕망은 하나님께 열려 있으면 생명의 힘이다. 하지만 자기 소유만 섬기면 약자를 삼키는 힘이 된다.
4절에서 나오는“그의 코의 높음”이라는 표현은 kə-gōbah appô이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코와 얼굴은 분노와 교만의 표정과 연결된다. 이것은 얼굴을 높이 들고 교만해진 상태로 설명한다.
여기서“높은 코”와 “하나님의 부재”가 연결된다. 악인은 자기 얼굴을 높이 들수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높은 코”는 자기 호흡, 자기 생명, 자기 의지를 절대화하는 상태로 읽을 수 있다.
생명은 위로부터 흘러오는 빛인데, 악인은 그 빛의 근원을 지우고 자기 생명력을 자기 소유로 착각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너무 크게 만든다.

5절에서는 악인의 신학이 현실에서 강화되는 이유를 보여 준다. 그는 잘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세계관이 맞다고 착각한다. 여기서 “길”과 “판단”이 대조된다.
악인의 길은 눈앞에서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높고 멀어 보인다. 이때 인간은 눈앞의 형통을 최종 진리로 오해한다.
세상에는 심판의 작용이 지연되어 보이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지연은 부재가 아니다. 당장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형통은 곧 의로움의 증거가 아니다. 결과가 좋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방법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자기 확신
6절에서 bal-ʾemmôṭ,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다른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인의 고백으로도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는 악인의 자기 확신으로 뒤틀린다. 믿음의 언어가 악인의 자기 안전 신화로 변질된다.
“흔들리지 않음”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신앙이지만, 자기 힘 안에 있을 때 교만이다.
악인은 단지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까지 장악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대대로”라는 표현은 자기 권력이 세대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환상이다.
영원성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악인이 자기 지위를 “대대로” 지속될 것으로 여기는 것은, 곧 왕권의 자리를 찬탈하는 상징적 행위로 읽을 수 있다. 악인은 자기 권력을 하나님의 왕권처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다.
오래 유지된 불의는 스스로를 정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오래되었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7절은 신체 이미지의 시작이다. 악인의 입, 혀, 눈, 손, 팔이 차례로 등장한다. 죄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몸 전체를 도구화한다.
악인의 폭력은 말에서 시작된다. 8절 이후 물리적 폭력이 나오기 전에 7절은 언어 폭력을 먼저 보여 준다. 말은 현실을 드러내는 힘이다.
말이 진리와 자비를 드러내면 세계를 세우지만, 저주와 속임으로 가득하면 세계를 무너뜨린다.
폭력적 구조는 대개 먼저 언어로 약자를 지운다. 조롱, 왜곡, 협박, 거짓 프레임은 이미 폭력의 시작이다. 7절은 악인의 입이 그의 폭력 체계의 첫 번째 무기임을 보여 준다.
7절의 언어 폭력이 8절에서 은밀한 살해와 감시로 확장된다. 1절의 “하나님이 숨으신 것처럼 보임”과 8절의 “악인이 숨어 있음”이 대조된다. 저자는 하나님께 숨지 말라고 묻지만, 악인은 실제로 숨어서 살해한다.
감시하는 장면을 통해 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눈은 인식과 욕망의 통로이다. 악인의 눈은 보살피기 위해 보는 눈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 보는 눈이다. 이것은 자비의 시선이 끊어지고 소유의 시선만 남은 상태로 볼 수 있다.
약자를 돕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것과 약자를 통제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 절은 감시와 정보 권력의 윤리까지 생각하게 한다.

8절의 매복 이미지가 9절에서 사자와 그물 이미지로 강화된다. “사자”는 고대 근동에서 압도적 힘과 포식성을 상징한다. “그물”은 약자가 스스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조적 포획을 나타낸다. 악인은 직접 때리는 것만이 아니라,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여기선 “숨어 있다”가 반복된다. 악은 공개적 힘뿐 아니라 은밀한 구조로 작동한다. 사자는 힘의 이미지이고, 그물은 시스템의 이미지이다.
악인의 죄는 단순한 순간적 분노가 아니다. 그는 기다리고, 계산하고, 포획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개인 감정의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운 개입을 요청해야 한다.
그물은 영혼을 얽어매는 왜곡된 욕망과 구조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생명력을 자유롭게 흐르게 해야 할 통로가 포획의 장치로 변한 것이다.
악은 사람을 돕는 관계망을 사람을 묶는 올가미로 바꾼다. 착취적 제도는 사람을 한 번에 무너뜨리기보다 빚, 두려움, 의존, 정보 부족으로 서서히 묶는다.
약자를 사냥하는 힘의 왜곡
10절은 히브리어 본문이 어렵다. 곧 기록된 형태와 읽는 형태의 차이가 드러난다. 이 절을 매복자가 자신을 낮추고 작게 만들어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습성으로 설명한다 <개역개정>. 또한 ḥēl kāʾîm을 “상한 사람들의 무리”와 관련해 풀이하기도 한다 <새번역>.
매복자의 낮아짐으로 읽으면<개역개정>, 악인의 은밀함이 절정에 이른다. 그는 강하지만 강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을 낮추고 숨겨 더 효과적으로 공격한다.
여기서 악인의 “낮아짐”은 17절의 “겸손한 자”와 전혀 다르다. 의인의 낮아짐은 하나님께 의탁하는 겸손이지만, 악인의 낮아짐은 공격을 위한 위장이다.
성경은 모든 낮아짐을 자동으로 미덕이라 하지 않는다. 겸손처럼 보이는 태도도 타인을 조종하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겉으로 온유하고 낮아 보이는 사람도 약자를 통제하고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그 낮아짐은 성품이 아니라 전략일 수 있다. 참된 낮아짐은 살리고, 거짓 낮아짐은 속인다.

11절에서는 1절의 질문이 악인의 입에서 왜곡된 결론으로 변한다. 저자는 “왜 숨으십니까”라고 묻지만, 악인은 “하나님은 숨어서 보지 않으신다”고 단정한다.
11절은 1절과 의도적으로 맞물린다. 저자는 하나님의 숨으심을 고통으로 경험하지만, 악인은 그것을 괜찮다고 해석한다.
악의 깊은 뿌리는 “하나님이 없다”보다 “하나님은 보셔도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심판자 하나님을 지우는 신앙 왜곡이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얼굴 숨김을 하나님의 부재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숨김 속에서도 하나님께 호소하고 회개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요구한다. 이 점에서 11절의 악인은 하나님의 숨김을 회개의 기회가 아니라 범죄의 기회로 바꾼다.
하나님의 즉각적 개입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더 깊이 하나님께 부르짖거나,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여기며 자기 욕망을 풀어 놓는다.
하나님의 정의와 왕권 고백
12절에서는 시가 전환된다. 1~11절이 악인의 묘사라면, 12절부터는 하나님께 직접 요청하는 기도이다. 11절에서 악인은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말한다. 12절에서 저자는 “잊지 마소서”라고 응답한다. 악인의 거짓말을 기도가 반박한다.
악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께 정의의 행동을 요청하고, 자신도 그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
13절에서 4절의 핵심 문장이 다시 등장한다. 반복을 통해 시편 10편의 중심 문제가 분명해진다. 문제는 책임 부정이다. 죄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을 몰라서만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셔도 내 행동을 묻지 않으실 것이라는 왜곡된 확신에서 생긴다.
책임을 묻지 않는 문화는 악을 키운다. 가정, 교회, 조직, 사회에서 “그냥 넘어가자”가 반복되면 13절의 악인의 신학이 제도화된다. 13절은 악인의 하나님 멸시가 책임을 묻지 않는 하나님을 상상한 데서 비롯됨을 보여 준다.
더불어 악은 은폐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찾으심은 감추어진 구조를 드러내는 빛의 작용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숨겨진 현실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11절의 “하나님은 보지 않는다”가 14절에서 정면으로 반박된다. 저자는 “주께서 보셨다”고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고아는 가장 대표적인 법적 취약자였다. 아버지의 보호와 대표권이 약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심”은 단순한 감시가 아니라 생명을 회복시키는 인식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감추어진 고통을 빛 안으로 가져오신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이 우주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14절에서는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을, 침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믿음 위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정의를 요청할 수 있다.
12절의 “손을 드소서”가 15절의 “팔을 꺾으소서”로 구체화된다. 하나님의 손은 악인의 팔을 꺾는다. 팔은 힘, 권력, 실행 능력을 상징한다.
“악인의 팔을 꺾는다”는 것은 힘 자체를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다. 생명을 섬겨야 할 힘이 억압의 도구가 된 것을 끊어 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6절에서는 간구가 왕권 고백으로 전환된다. 저자는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왕권을 먼저 고백한다.
“여호와는 왕이시다”는 시편 신학의 핵심 문장이다. “영원무궁”은 악인의 “대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6절의 자기 확신과 대조된다. 악인은 자기 안전을 영속화하려 하지만, 실제 영원성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은 예배당 안의 고백이 아니라 약자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은 권력 숭배를 거절하는 정치적·사회적 신앙 고백이다.

17절에서는 시의 정서가 탄식에서 확신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들으시는 분이다.
“소원”은 taʾăwat ʿănāwîm이다. 3절의 악인의 taʾăwah, 곧 자기 욕망과 대조된다. 같은 “욕망/소원”이라도 악인의 욕망은 타인을 삼키고, 겸손한 자의 소원은 하나님께 들려진다.
“마음을 준비시키신다”는 tāḵîn libbām이다. 하나님은 단지 외부 상황만 바꾸지 않으신다. 억눌린 자의 마음을 세우고 안정시키신다.
“귀를 기울이신다”는 표현은 7절의 악한 입과 대조된다. 악인의 입이 해를 만들지만, 하나님의 귀는 고통을 받아들인다.
시편 10편을 통해 신체 이미지로 시작된 악인의 폭력을, 하나님의 신체 은유로 뒤집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악인의 입과 혀와 눈과 팔에 맞서, 하나님은 손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신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준비되고 안정되는 회복이다. 공동체는 피해자의 마음을 재촉하지 말고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18절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추상적 승리가 아니라, 약자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로 완성된다. 마지막 절은 악인을 신화화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땅에서 난 인간”이다. 시는 공포의 주체를 작게 만든다. 악인은 사자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왕권 앞에서는 흙에 속한 유한한 인간이다.
시편 9편 마지막도 열방이 자신들이 인간임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로 끝난다. 시편 10편도 땅의 인간이 더 이상 공포를 주지 못하게 해 달라는 기도로 끝난다. 두 시는 “악인의 신격화 해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정의의 목표는 복수 감정의 충족이 아니라 피해자가 다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상태이다. 공동체적 회복은 “가해자가 미안하다고 했다”에서 끝나지 않고, 피해자가 더 이상 공포 속에 살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는 데까지 가야 한다.
시편 10편1절부터 18절 묵상을 마무리하며…
시편 10편1절부터 18절 묵상을 하면서, 악인의 행동보다 악인의 세계관을 더 깊이 파고든 것을 볼 수있었다. 악인은 단지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은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교리로 바꾼다. 그리고 그 교리 위에서 약자를 추격하고, 속이고, 감시하고, 포획하고, 쓰러뜨린다.
그러나 저자는 악인의 거짓말을 세 단계로 반박한다. 첫째, 악인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하지만, 시인은 “주께서 보셨다”고 고백한다. 둘째, 악인은 “하나님이 찾지 않으신다”고 하지만, 시인은 “그의 악을 찾으소서”라고 기도한다. 셋째, 악인은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인은 “여호와는 영원히 왕이시다”고 선포한다.
결론은 단순히 “악인은 벌받는다”가 아니다. 더 깊은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약자의 공포가 끝나는 곳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말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고아와 눌린 자가 회복되고, 땅에 속한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처럼 군림하지 못하게 되는 현실이다.

[따름&드림]
오늘의 기도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깨우침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악한 자들의 속성을 이해하면서, 제 안에서도 악한 자의 속성이 있는지 돌아보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역사가 고아와 억눌린 자를 보살펴주시는 것임을, 배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스스로 악한 자의 성향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알아보게 하소서.
점점 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감동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시편 10편 1절부터 18절 묵상 성경 큐티 글쓰기는, 개인적으로 정리한 신앙적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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